229. 놀다가 숱하게 져도 보고 죽어도 봐야 한다. 악다구니를 끝까지 써보기도 하고 제힘이 얼마 정도인지 한껏 써볼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것 저런 것을 다 못하게 막기만 하면 아이들은 몸 안에 힘을 쌓아 놓을 수밖에 없다. 쌓아 놓은 힘이 임계치를 넘으면 밖으로 터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거친 몸싸움이야말로 아이들한테 꼭 필요하고 여러 어려운 상황이지만 허용해야 할 중요한 놀이다. 기다리면서 가까이 지켜보면 아이들의 거친 몸싸움 놀이라는 것이 어떤 선을 넘고 있지 않음이 보일 것이다. 거친 몸싸움 놀이를 지금보다 좀 더 넉넉히 허용했을 때다. 무기력과 좌절에서 벗어나 어떻게 회복력과 탄력을 몸과 마음에 담을 것인지 거친 몸싸움 놀이에서 그 실마리를 만나길 바란다. 아이들끼리 깐죽거리고 티격태격하는 것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놀며 삼매에 들다
231. ‘깍두기’는 요즘으로 치면 약자에 대한 배려이고 관용이며 나아가 모두가 평등한 출발에 서기까지 기다려 주는 사려 깊은 마음씀씀이다.
233. 공기놀이에 빠지다 보면 어느새 공기놀이의 재미를 지나 깊은 평화로움과 만나기도 한다. 공기놀이의 재미를 지나 깊은 평화로움과 만나기도 한다. 공기놀이에 몰입된 아이들을 보면 마치 깊은 명상 속 삼매에 빠진 듯이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바로 이때 아이들은 두려움과 걱정의 찌꺼기를 태운다. 그리고 놀이가 끝났을 때 아이는 놀이 이전의 아이와 아주 다른 존재로 태어난다. 자 어떻게 놀지 않고 아이들의 영혼이 날마다 푸를 수 있겠는가. 하루를 잘 논 아이는 짜증을 내지 않는다. 10년을 잘 논 아이는 마음이 건강하다.
더워도 밖에서 추워도 밖에서
238. 요즘 아이들은 어떤가. 마당과 골목과 동무를 잃어버려 놀이의 공간과 시간과 관계는 손톱만큼 작아졌고, 어려서부터 엄마 아빠의 집요한 간섭과 기획과 상품 광고와 연예 산업의 표적이 되어 자란다... 자극적인 시각과 청각의 강렬함에서 벗어나려면 몸의 세계, 다시 말해 놀이의 세계와 앞서 만나야 한다.
239. 어려서 즐겁게 놀았던 유년의 기억이 어른이 된 나를 지금껏 밀어가는 바닥나지 않는 힘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릴 때 놀던 힘을 꺼내 오늘을 산다. 그런데 마음껏 놀지 못한 우리 아이들은 이 불확실의 세상을 무슨 힘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놀지 못해 마음마저 아프고 몸은 시들어 가는데 말이다.
242. 실내에서 하는 이런저런 얄궂은 칠교니 산가지니 하는 깨작깨작하는 놀이를 내던지고 우비에 장화를 신고 물, 불, 바람, 흙 속에서 아이들은 세상과 만나야 한다. 진정한 놀이는 아이들이 아주 오랜 옛날부터 있었던 것들과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예를 들어 추위, 더위, 비바람, 집 밖에서 하룻밤 보내기, 밤길 걷기, 비 맞기, 눈구덩이에 구르기 등등의 것들이 아이들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아하는 놀이다.
자본에 가장 극력하게 저항하는 길
252. 자본과 싸우려면 잘 놀아야 한다. 이 싸움이 놀이가 될 때 우리는 자본을 이긴 것이나 다름없다. 자본에 가장 극렬하게 저항하는 것 또한 잘 노는 것이다.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놀 줄 알아야 한다. 이런저런 장난감과 게임기, 스마트폰, 노래방 탬버린을 내려놓고 맨손으로 놀 수 있어야 한다... 자본에 빼앗긴 놀이와 낭만을 되찾아 오자.
253. 간교하고 잔혹한 자본의 세계와 가장 잘 맞서는 사람은 분명코 놀 줄 아는 사람이리라. 놀 줄 아는 어린이 아이를 놀게 할 수 있으리라. 기억하라. 노는 것을 잊어버린 아이거나 지금 놀 때가 아니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노예라는 것을...
‘놀이밥’ 한 그릇
아이는 한가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이는 마음껏 뛰놀 수 있는 곳이 필요합니다.
아이는 함꼐 놀 수 있는 동무가 있어야 합니다.
놀 틈, 놀 터, 놀 동무가 있어도 허용하는 마음이 없으면 아이는 놀 수 없습니다.
하루 두세 시간씩 ‘놀이밥’을 꼬박꼬박 먹습니다.
이제 ‘자유놀이’의 고향으로 돌아가자
유아교육의 떠나온 고향을 찾아서: 아이들이 스스로 하고 싶은 놀이를 막고 거꾸로 인지나 학습과 연결하려 한다면 교사는 오히려 아이들의 놀이를 방해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렇듯 놀이를 학습의 보조도구로 쓰는 경우가 유아교육 현장에서 자주 보인다. 이것은 아이들 놀이를 타락시키는 것이고 그 결과 학습의 가치를 강요하는, 쉽게 말해 결코 놀이라 할 수 없는 것을 놀이라 우기는 것이다.
2. 놀이는 누가 선택하고 아이들은 정말 노는가: 놀이에서 스스로 놀고 싶어 논다는 자기결정이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표어에 그치고 있다. 가슴 아픈 것은 아이들은 그런 생각을 잊어 가고 있고, 교사는 오늘도 내일 아이들과 무엇을 할 것인지 아이들의 ‘놀이욕구’와 상관없이 이런저런 것을 뒤져 계획을 세우느라 너무 피곤하고 바쁘다는 점이다... 어떤 놀이를 하며 하루를 보낼 것인가에 대한 교사와 아이들이 조화로운 대화를 꽃피울 수 있는 곳으로 어린이집과 유치원이 바뀌기를 바란다. 이런 자유놀이가 가능하려면 무엇보다 교사에게 ‘자유’가 주어져야 함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3. 놀이가 크게 달라지는 시기와 까닭: 4세에서 5세로 넘어가는 아이들이 이 시기에 말이 빠르게 는다. 이 즈음 이야기를 듣는 힘도 아주 커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놀이와 말’ 또는 ‘놀이와 이야기’가 함께 나란히 간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놀이와 말 또는 이야기는 아주 긴밀한 관계 속에서 발전한다는 점이다.
4. 놀잇감, 장난감, 교재교구를 보는 새로운 눈: 사람과 사람이 아이들과 아이들이 만나는 놀이를 밀어내고 교재교구라 이름 붙은 물건을 가지고 노는 것이 유아교육에서 생각하는 놀이라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일이다. 어디까지나 교재교구는 아이들끼리 흠뻑 놀고 난 다음에 시간이 그래도 남으면 하는 ‘두 번째 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비고츠키가 말했던 것처럼 아이와 아이, 아이와 부모, 아이와 교사가 서로 주고받는 상호작용이 없다면 추상의 세계로 나가는 능력은 생기기 어렵다... 한국의 유아교육은 실내에서 실외로, 교사의 선택에서 아이의 자유놀이로, 장난감에서 놀잇감으로 대 전환이 절박하다. 이렇게 서서히 꾸준히 ‘자유놀이’라는 유아교육의 고향으로 돌아가자. 만약 유아와 함께 ‘자유놀이’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유아의 몸과 마음이 멍들고 개정 누리과정은 정처 없이 떠돌 것이다.
아이는 노는 데 도가 터야 한다
267. 왜 요즘 아이들은 그렇게 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울고불고 분통을 터뜨리는 것일까... 아이들이 그동안 놀이다운 놀이를 해본 경험이 너무 적은 탓이다... 그렇게 하면서 놀이 밖 현실에서 겪는 거절과 좌절의 경험을 즐기고 이겨내는 힘을 기른다. 놀이는 그래서 참 중요하다... 함께 놀며 아이들은 화를 다스리고 다음을 기다리고 감정 표현을 늦추는 법을 스스로 배우며 ‘긍정’에 도착한다. 요즘 아이들이 ‘자기통제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까닭은 바로 놀이의 양적 결핍에 원이인 있음을 분명히 말하고 싶다.
269. 아이들 노는 것을 지켜보다 보면 끼어들어야 하나 내버려 두어야 하나 갈등하게 되는 대목과 맞닥뜨릴 때도 있다. 이때 ‘끼어들기’나 ‘멈추기’보다는 ‘바라보기’나 ‘이어주기’나 ‘함께하기’의 길을 찾아보기를 권하고 싶다. 아이들과 함께 놀 때 어른 스스로 완전히 아이가 되어 몰입하는 경우부터 나 몰라라 방관자에 이르기까지 그 폭은 꽤 넓다. 중요한 것은 놀이를 이끌기를 멈추고, 놀이 할 수 있는 환경을 가꿔 주고, 놀이를 이어주고, 아이들이 잘 어울릴 때 빠지고, 아이들이 같이하자고 할 때 함께하는 열린 태도 그 어디쯤일 것이다. 아이와 놀려면 한없이 유연해야 한다. 아이들이 타고난 것이 둘 있다. 하나는 놀이고 또 하나는 부지런함이다. 아이들은 이 둘을 합쳐 놀이에 도가 트는 것이다. 참말이다
놀이가 아이 안에 소복이 있어요
271. 아이들과 놀이 속으로 들어가 함께 놀지 못하고 가르치려고만 드는 교사는 불행하다... 지금은 내가 먼저 나서 놀자고 하는 일이 없으니 그렇게 마음 편할 수가 없다. 놀이가 나에게 있는 게 아니라 아이 안에 소복이 있다는 것을 긴 공부 끝에 깨우쳤기 때문이다.
272. 놀이는 가르칠 수 없다. 아이 안에 놀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책을 펴놓고 배울 수도 없다. 오로지 놂으로 느낄 수 있고 그 재미있고 따뜻하고 때론 흥분되는 느낌을 아이들과 나눌 수 있다. 놀려면 놓여나야 한다. 놀려면 교사와 아이들의 일상을 붙잡고 있는 이런저런 것들에서 놓여나야 한다.
272. 슈타이너는 아이들에 대해서 공부할 수 있는 책은 없다고 했다. 아이들을 책으로 삼아 배워야 한다는 말이다. 놀이 또한 마찬가지다. 제대로 놀려면 놀이하는 방법과 차례가 적힌 책과 재주와 기술을 내던져야 한다.
273. 놀이보다 중요한 것은 놀다가 생기고 쌓이고 오가는 따뜻한 눈빛과 사랑과 이해와 우정이다... 사랑은 말로 마음에 새기기 어렵다. 교사와 부모와 아이들이 놀이를 가운데 두고 서로 부대껴야 사랑의 싹을 틔울 수 있다... 그때그때 상황을 놀이로 여기고 앞에 있는 것들을 가지고 즐겁게 놀 수 있다면 그만이다. 노는 시간이 바로 사랑을 나누는 가장 충실한 시간이다.
274. 놀이는 우정과 사랑, 웃음과 울음이 빠지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그리고 그 놀이는 아이 밖에 있지 않고 아이 안에 가득하다... 놀이는 아이 안에 있고 아이는 놀면서 마침내 자기가 된다.
아이의 놀이가 멈추면 아이의 숨도 멈춘다
275. 공터와 골목이 사라지면서 놀이가 사라지고 담 너머 시끄럽던 아이들 소리도 이제 듣기 어렵다. 그 많던 아이들은 뿔뿔이 건물 속으로 사라졌고 바깥놀이터에서도 아이들 보기가 쉽지 않다.
아이들과 아이들 문화에 관심이 많은 분들조차도 아이들에게 좋은 책을 만나게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지 밖에서 뛰노는 것이 먼저라고 애써 말하는 사람은 적다.
277. 대한민국에 뿌리내린 신자유주의라는 것이 아이들을 얼마나 빠르게 기운 없고 생기 없고 웃음 없이 만드는지 아시아와 중동의 여러 골목을 헤매며 절감했다... 대한민국 아이들은 몸과 마음의 건강이 썩 좋지 않다... 그러나 신나게 뛰어놀며 생명의 기운을 몸 안에 가득 담는 아이는 거친 환경과 음식 앞에서 쉬이 쓰러지지 않는다. 놀이는 아이들을 살려 내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279. 이렇게 어린 시절부터 끔찍한 경쟁의 한복판에서 자라는 우리나라 아이들이 다른 세상의 아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것이 쉽지 않아 보인다.
아름다운 것, 새로운 것, 이로운 것을 만든 것은 언제나 놀이다. 아이들은 놀면서 생명의 아름다움에 눈뜨고, 새로운 낯선 세계로 발을 옮기고 그 속에서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 무언가를 창조하는 데 이렇듯 꼭 있어야 할 놀이와 생기를 아주 어려서 거세당한 아이들이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일에 서툰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280. 아이들을 놀게 내버려 두시라. 어려서 마음껏 놀았던 아이는 결코 스스로를 해치지 않는다. 놀지 못하면 아이는 마음이 굳고, 놀이를 빼앗기면 아이의 몸은 무너진다. 하지마! 만지지마! 가지마! 조심해! 위험해! 올라가지마! 뛰지마! 울지마! 마! 마! 마! 이렇게 아이의 놀이와 자유가 멈추면 아이의 피도 숨도 멈춘다. 그 길로 정녕 기야 하는가.
아이들 편을 들자 아이들 편에 서자
281. 아이들은 말을 못하니 세상이 어른들 마음대로다.
‘진짜 놀이’도 ‘가짜 놀이’도 없다
284. 실내에서 기획된 체험과 성인이 미리 선택한 놀이를 하도록 한 것은 아니었는지 물을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그런 ‘체험의 공간에 재미와 즐거움과 놀이의 자유가 있어서 유아들이 그렇게 양적으로 많이 왔던 것인지 아니면 그런 곳만 만들다 보니 그런 곳밖에 갈 수 없어서 이용 유아가 많았던 것인지 냉철해져야 한다.
285. 아이 안에 놀이의 씨앗이 있음을 한없이 긍정하는 것이다... 유아가 자신 속에 있는 놀이의 씨앗을 볕 잘 드는 곳에 꺼내 놓고 물을 주고 가꾸어 가는 것을 거드는게 우리의 존재 이유이고 우리의 즐거움이고 환희라는 것을 잊지 말자... 그 많은 혼란과 비효율과 과도한 비용 낭비와 실내 집중과 체험의 과잉이 사실은 ’놀이가 아이 밖에 있다‘는 망상에서 출발해서 생긴 지루한 해프닝이었음을 깨우쳐야 한다.
287. 유아교육에서 말하는 놀이는 ’철저한 자유놀이 그 자체‘다. 한국 유아교육은 떠내려 온 시절을 되짚어 올라가 ’자유와 놀이‘라는 발원지를 찾기를 바란다.
아이는 놀 때 가장 쉽게 배운다
289. 세상 곳곳의 아이들이 그들이 타고난 결대로 살 수 있도록 곁에서 나란히 걷는 사진가로 살면서 세상의 아이들을 좀 더 넓고 깊게 만나고 싶다.
하루를 잘 논 아이는 짜증을 모르고, 10년을 잘 논 아이는 명랑하다
아이들은 이렇게 멸종하는가?: 타인인 아이를 향한 강요는 부모 스스로의 인간성을 황폐화시킬 것이다. 좋은 부모는 가장 적게 요구하는 부모이고, 진정 좋은 부모는 요구하지 않는 부모다. 부모가 물러설 때 아이는 나아간다... 아이가 다시 일어서 가려면 이 아이한테는 무엇이 튼실하게 자리 잡고 있어야 할까. ’되살아나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놀이다.
게임과 소셜미디어는 아이들의 노동이 되었다: 아이들은 그동안 놀지 못한 놀이에 허기가 져 게임에 빛과 같은 빠르기로 입문하는 것이다. 이를 바로잡으려면 빼돌리고 빼앗은 ’놀이‘를 제자리로 돌려놓는 일과 ’극단적 이윤 추구‘라는 천박한 게임의 본지에 관한 무자비한 비판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한다.
조금 더 더럽고 시끄럽고 어지르며 키우자: 아이들이 마음껏 뛰고 소리 지르고 웃고 울부짖게 말이다. 건강한 아이는 늘 바쁘다. 조그만 내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바빴냐 하면 뭘 하고 놀아야 할지 모를 만큼 놀 게 많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놀고 잠잘 때 자란다... 대부분 부모가 집에 없다. 먹는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유기농도 친환경도 아닌 누구랑 먹느냐다. 혼자 밥 먹기만큼 사람을 피폐하게 만드는 것도 없다. 이것은 혼자 놀기의 어려움을 짐작하면 이해할 수 있다. 골방에서 유기농 혼자 먹어서 무슨 큰 이로움이 있을까.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바른 먹을거리를 먹지 못하고 또 학원에서 학원으로 옮아간다. 대한민국의 아이들은 유아에서부터 청소년 때까지 십수 년을 이렇게 떠돌며 멸종해 가고 있다. 분명 아동기와 그들의 놀이는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아이들은 간섭과 제지와 금지로부터 해방시키자: 밖에 나갔더니 우리 아이와 함께 놀 아이들이 없다고 하지 말고 먼저 내 아이와 함께 밖으로 나가길 바란다. 그렇게 누군가 나와서 놀고 있다면 다른 집 부모도 자기 아이의 손을 잡고 나올 것이다. 같은 또래 아이들을 키우는 옆집 부모와도 손을 잡지 못하게 만드는 이 자본의 경재와 소외와 분열에 맞서는 용기와 저항이 진정 필요하다. 그리고 그 싸움 자체가 우리의 즐거움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자본에 가장 격렬하게 저항하는 길 또한 우리 어른도 아이도 재미있게 노는 것이다... 앞에서 놀아야 이긴다고 했다. 더불어 안 사야 이긴다. 그리고 마침내 자본에 이기려면 외롭고 고독하고 쓸쓸하고 가난해야 한다... 성장을 멈춘 일상 속에서 아이들과 함께 가난하고 소박한 ’놀이의 길‘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권정생의 ‘엄마 까투리’를 읽고
318, 그렇게 엄마 까투리는 온몸이 바스라져 주저않을 때까지 새끼들을 지켜 주고 있었습니다.
에필로그: 놀이 박탈의 시대, 아이에게 더 많은 자유놀이와 상상놀이를!
어린이의 한 시절이 사라졌다.
321. 아직 놀이에 대한 오해의 그늘은 넓고 짙다. 놀이는 현실 속 쓸모 있는 것들 다음으로 차례가 밀리고, 낭비로 보며, 배움과 대척점에 있다는 사고가 어린이 가까이에서 여전히 작동되고 있다.
놀이란? 자신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즐기며 몸에 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322. 사회적 거리 두기가 놀이와 우정과 거리 두기로 이해되거나 대체되거나 오용되는 것에 눈을 부릅떠야 한다. 놀이의 가치는 위기가 깊어질수록 점점 더 차례가 밀리고 저평가되고 무가치하고 무모한 영역으로 취급받고 있다. ’놀이운동‘은 이렇게 손발이 잘리고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포박당한 채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323. 전염병 예방에 대한 정보 전달과 대처는 어린이의 활동을 통한 일상적 건강 돌봄과 균형을 이뤄야 마땅하다. 놀이를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학교와 교사와 보호자에게 없다... 이렇게 코비드 19는 놀이의 시대를 ’반 놀이의 시대‘로 아무런 저항 없이 그것도 아주 빠른 속도로 퇴행시켰다.
’놀이의 길‘을 찾아 나서자
대한민국 어린이 놀이환경의 실제적 민낯은 코비드 19로 비대면이 강제된 현제 상황과 견주어 그리 다르지 않다는 냉철한 인식이 필요하다.
대한민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놀이와 놀이터와 놀이권 관련 개인이나 단체나 기관에 공공재로서의 ’기본놀이‘ 개념을 제안한다. 이것은 ’기본소득‘개념에 빚진다... 놀이를 기본소득의 중요한 축인 ’사회권‘의 하나로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 놀이 위기 속에서 길을 잃지 않는 데 매우 유용하다고 본다.
코비드-19가 한창인 상시적 위기의 시대에 ’자유놀이‘와 만나는 행운을 어린이와 함께 누기리길 권한다... 어린이는 이 가혹한 시기를 보내면서 건강한 몸도 건강한 마음도 모두 잃을 수 있다. 위기의 시대, 어린이에게 허용적 태도와 자유놀이가 더욱 풍성해야 하는 ᄁᆞ닭이다. 특히 성인 주도 놀이활동에 신중해야 한다. 이런 시기일수록 성인 주도 활동이 어린이의 자기주도적 활동을 마비시켜 더욱 우울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이는 지금 더 ㅁ낳은 자유놀이와 상상놀이가 절실하다.
온라인 놀이터를 애써 활용하는 방법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안에서 바깥으로의 과감한 이동과 전환이다... 어떠한 경우라도 위험에 대한 지나친 걱정과 공포에 어린이의 놀이와 자유가 일방적으로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가장 중요한 놀이 철학임을 분명히 밝힌다.... 더 나아가 가장 일상적이고 이동할 필요가 없으며 특별한 놀이공간을 만들지 않아도 가능한 놀이 장소인 ’홈과 하우스‘가 마른 하늘에 날벼락처럼 어린이 가까이서 놀이환경을 고민하는 양육자와 보호자에게 발견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 가까운 이웃과의 교류를 통한 상호의존성 또는 상호연결성’ 또한 이참에 공부가 필요하다. 홈과 하우스야말로 최고의 놀이터인데 이 점을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지나치게 간과하고 있다... ‘Street Play’ 운동 시민모임... 길거리 놀이터 운동.
6. 어린이 스스로 선택하고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기후 위기 속 놀이의 길과 삶의 길을 오늘 성실히 찾아야 한다. 코비드-19와 동거하며 어린이와 함께할 최소한의 ‘놀이의 길’을 알뜰히 찾아 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기후 위기를 맞는다면 놀이를 잃는 것 뿐 아니라 우울과 불안을 넘어 절망과 체념을 지나 두려움과 공포에 갇히게 될 것이다. 그 길은 앞서 있었던 익숙한 길이 아니고 새로 개척해 가는 놀이의 길일 것이다. 물론 기후 위기를 늦추고 막기 위한 행동에 놀이도 놀이터도 놀 권리도 동행해야 마땅하다.
좋은 상황이 오기만을 기다리지 말고, 대면 상황이 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잠시라도 날씨가 좋아 밖에 나갈 수 있는 상황이 온다면, 어린이가 밖으로 나가 놀고 싶다면, 수업 중이라도 시험 중이라도 즉시 나가서 놀이의 시간과 포옹해야 한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를 놀이기회를 다음으로 미루지 말고 즉각 하던 일을 멈추고 밖으로 나가 놀 수 있는 예민함과 기민한 전환과 결정의 대담함이 어린이와 보호자와 교사 모두에게 도착했다. 교육은 텅 빈 운동자와 자연을 양육은 홈과 하우스와 거리를 재발견해야 한다.
어린이는 질병과 위험과 위기 속에서도 알고 선택하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하고, 어린이는 헤아리고 선택하고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다. 나는 이 명제를 권정생 선생님께 배웠다. 어린이가 그런 선택과 판단을 스스로 할 수 있는 환경을 가꿔 주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라 믿는다.
<느낀점>
책을 읽으며 마음에 와 닿는 구절들이 많아 글을 옮겨 치다보니 내용이 너무 많아졌다. 글을 다 쓰고 그 내용을 다시 요약해 키워드로 노트 한 바닥에 적어 보았다.
‘거친 몸싸움, 삼매, 깍두기, 두려움과 걱정의 찌꺼기 태우기, 돈 한 푼 드리지 않고 놀기, 놀지 못하면 노예, 허용, 자유놀이의 고향, 자기 통제력, 사라지는 아이들, 타고난 결, 되살리는 힘, 예방과 돌봄의 균형, 홈과 하우스, 이웃과 상호 의존성, 상호 연관성, street play,’
저자는 아이 안에 놀이가 소복이 있음을 강조하며 언급한 대목이 있다.
‘아이들이 타고난 것이 둘 있다. 하나는 놀이고 또 하나는 부지런함이다. 아이들은 이 둘을 합쳐 놀이에 도가 트는 것이다. 참말이다.’(p269)
놀이 박탈 시대를 맞이한 아이들을 위해 절박한 심정으로 여러 제안을 하고 있다. 특히 저자가 언급한 예민함, 기민한 전환, 결정의 대범함은 인상 깊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를 놀이기회를 다음으로 미루지 말고 즉각 하던 일을 멈추고 밖으로 나가 놀 수 있는 예민함과 기민한 전환과 결정의 대담함이 어린이와 보호자와 교사 모두에게 도착했다.’(p336)
눈이 오는 날이면 플레이스타터들은 어김없이 아이들과 밖으로 나가 노는 모습이 단톡방에 올라온다. 아이들을 놀 수 있게 하려고 애쓰는 이들을 보며 마음이 따뜻해진다.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도구를 사용하며 풍성한 놀이를 할 수 있도록 ‘집콕 모험놀이터’를 기획하고, ‘리사이클링 플레이’ 릴레이 영상을 찍기도 한다. 최근에는 아이들에게 ‘야외 모험놀이터’를 만들어 주고 싶어 지역 주민들과 회의를 시작하고 반년 동안 스터디를 진행하며 자신들의 자녀들과 시범 운영을 하고 하반기에 뜻있는 주민들의 참여를 제안할 예정이라고도 한다. 우리 플레이스타터들이 저자가 마지막에 언급한 권정생 선생님의 <엄마 까투리> 속 어미 새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들 곁에서 그들이 꿈꾸고 소망하는 것을 든든히 지원하는 행정과 시민의 다리 역할을 해 나가고 싶다.
<질문>
올해 당신은 나의 자녀와 우리의 아이들의 놀이 환경을 가꾸기 위해 무엇을 기획하고 계시나요?
이쪽과 저쪽으로 나누어 겨루는 놀이를 할 때, 어리건 몸이 약한 아이를 깍두기로 뽑아 놀이 속에 끼워 주는 관심과 배려의 철학이 오롯이 녹아있는 말이다. 따지고 보면 이 깍두기는 아직 놀이에 어설픈 아이들이 바로 놀이속으로 들어왔을 때 겪을 수 있는 실패와 좌절을 줄여주는 완충 역할을 훌륭히 했다.
p238
우리는 놀았다. 우리끼리 놀았다. 잘 놀았다. 온종일 놀았다. 더워도 추워도 놀았다. 꼭 밖에서 놀았다. 어려서는 할머니 할아버지 무릎이 놀이터였고 조금 커서는 온 산동네가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멀리 야산에 가서도 놀았고 까마득히 높은 축대에서 뛰어내리는 위험한 모험도 겁없이 감행했다. 그러나 오래 앓는 아이가 적었다.
p269
'끼어들기'나 '멈추기'보다는 '바라보기'나 '이어주기'나 '함께하기'의 길을 찾아보기를 권하고 싶다.
놀이를 이끌기를 멈추고, 놀이를 할 수 있는 환경을 가꿔주고, 놀이를 이어주고, 아이들이 잘 어울릴 때 빠지고, 아이들이 같이하자고 할 때 함께하는 열린 태도 그 어디쯤을 것이다.
p299
아이들은 놀아야 한다. 놀아야지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고 또 잘하는지 알 수 있다. 놀면서 땀을 흘려야 한다. 덥다고 에어컨 앞에만, 춥다고 온실 안에만 있으면 아이들은 체온 조절능력을 잃어버리고 이것은 곧 자율신경의 균형을 무너뜨려 질병에 이르게 한다. 이 땀은 아이들의 성실함과 하고자 하는 열망을 만드는데 없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아아들을 조금 더 더럽게 밖에 내놓고 키울 일이다. 탈탈 털어키우면 아이가 약골이 된다. 덧붙이자면 좀 더 소란스러운 곳도 필요하고, 좀 더 어질러진 곳도, 좀 더 위험한 환경도 필요하다. 꼭 필요하다.
느낀 점 & >
글을 읽는 동안 아이들을 어떻게 하면 놀 수 있게 할 수 있을까란 생각을 참 많이도 했다.
요즘같은 세상에 하교 후 아이들이 끊임없는 스케줄은 내(부모)가 없는 동안 아이의 안전이 걱정이 되는 부모들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부모들이 걱정하지 않고, 아이들이 자유롭게 놀 수 있는 시간을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역 주민들의 관심? 세상 어두운 것들로부터 안전한 공간? 아이들을 지켜봐주는 어른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등....
p201 자본의 한복판을 사는 놀이터 벗들이여! 우리는 아이들 일을 하는 사람답게 튼튼하게, 민망하지 않게, 빨리 멋지게 하려 하지 말고 작고 오래 할 생각을 해야 한다.
p222 아이들이 놀고 싶어 곧 죽겠다는 것을 알야차려야 할 때
몸을 비비꼬고 비틀 때
앉았다 일어났다 할 때
돌아다닐 때
딴청을 부릴 때
창 넘어 먼 곳을 볼 때
밖과 닿아 있는 창문을 자꾸 바라볼 때
하품을 할 때
짜증을 부릴 때
말을 안들을 때
혼자 떠들 때
함께 떠들 때
투정을 부릴 때
던질 때
망가뜨릴 때
옆 친구를 툭툭칠 때
위험하고 거친 행동을 할 때
말없이 주위를 맴돌 때
싸울 때
소리 지를 때
울 때
이 때는 온 몸으로 밖에 나가 놀고 싶다는 아이의 간절한 호소이니 번개처럼 알아차리고 행동해야 한다. 부디 외면하지 말자. 이런 상황과 맞닥뜨리면 당장 하던 일을 멈추고 놀이를 허용해야 한다. 아이들은 시간이 없어서 장소가 없어서 친구가 없어서 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허용'이 없어 놀지 못한다. 부디 더 허용해야 아이도 어른도 살 수 있다. 어제보다 오늘, 오늘 보다 내일 조금 더 허용해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이 자란다.
무릇 동심이란 진실한 마음이다. 만약 동심이 불가능하다고 한다면, 이것은 진실한 마음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동심이란 거짓을 끊어 버린 순진함으로 사람이 태어나서 처음 가지게 되는 본마음을 말한다. 동심을 잃게 되면 진심이 없어지고 진심이 없어지면 진실한 인간성도 잃는다. 사람이라도 진실하지 않으면 처음의 본마음을 다시 회복할 수 없다. 어린아이는 사람의 처음 모습이고, 동심은 사람의 처음 마음이다. 처음 마음이 어찌 없어질 수 있는가? 그렇지만 동심은 왜 갑자기 없어지는 것일까?
~느낀점 : 동심은 없어지는 게 아니라 삶과사회 속에 길들여지며 잠시 잊혀지는 게 아닐까?
아날로그로 한 시절을 보내고 지루하게 느껴졌던 적막강산을 벗어나 이런 삶이 진정한 삶이 아닐까?를 생각하며 자유와 모험속에 어리기도 하고 젊었던 나를 그 안에 집어 던졌었다.
사랑이라 믿었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20대 후반과 30대를 지날 즈음에는 삶의 무게에 짓눌려 하루하루가 버겁기만 했던 날들도 보냈었다.
그 시절 아이들을 위해 읽어주었던 그림책을 만나면서 잊고있었던 나의 동심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 중 내게 큰 변화를 주었던 다시 상상의 날개를 돋게 만들었던 책이 <나니아 연대기>였다. 처음 이 책이 출판되었을 때 세상사람들은 아이들이 너무도 좋아해서 놀랐고 가까운 사람들은 c.s 루이스의 개인사로 놀랐었다.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없는 그가 어떻게 아이들이 이토록 환호하는 책을 만들어냈을까? 하는 점이었다. 그건 루이스가 자신의 어린시절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한다.
우리가 어린시절의 기억들을 루이스의 말처럼 나이테와 같이 기억하며 성장한다면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세상은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이 함께 공존한다. 아이들은 그사이에서 살아간다. 약간의 더러움과 오염에 노출이 절대적으로 아이에게 필요하다. 특히 어린 시기에 맨발로 흙과 모래를 밟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면역과 운동능력을 높이는 가장 손쉬운 일임을 알아야한다. 아이들이 놀다가 더러워지고 소란스럽고 어지르고 다치는게 놀이다. p169
2. 슬라이드인가 클라임인가
전 세계의 아이들은 오늘도 수없이 미끄럼틀을 거술러 기어 오른다. 제도와 놀이욕구의 심각한 불일치다. 제도와 놀이욕구의 심각한 불일치이다. 놀이기구 이름은 아이들을 길들인다. 놀이기구의 쓰임과 재미와 빈도로 보았을 때 이 놀이기구의 이름은 ‘오르내림틀’이 맞지 않을까? 폭 넓은 오르내림틀은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p.180
3. 무장애놀이터는 차별이다
무장애놀이터를 별도의 공간에 강조해 만들고 홍보할 일이 아니라 모든 공공놀이터가 장애 아이들이 쉽게 와서 비장애 아이들과 함께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순서다. 중략~ 장애 아이들과 일반 아이들이(비장애 아이들 이렇게 쓴다고 합니다) 함께 어울려 놀 수 있는 놀이터가 필요할 뿐이다. 장애와 비장애는 자주 길게 만나야 한다. 그렇게 만날 수 있는 곳이면 그곳이 둘 모두에게 최고의 놀이터다.
타성포장과 조합놀이기구
맨 앞에서 가로막고 있는 물리적 장애물과 상상의 장애물이 있으니 그것이 탄성포장과 조합놀이기구이다. 이 둘은 놀이터 비용을 독차지한다. 이 둘을 그대로 두고는 놀이터 상상력을 마음껏 펼 수 없다. 더불어 기존의 놀이기구 위주의 놀이터에서 자유놀이 위주의 놀이터를 구상하는 놀이터 철학이 재정립되어야한다.
느낀점
요즘은 너무 미세먼지가 많다보니 청정을 요구되는 시대이다. 장소나 공간이 더러워도 아이에게 피해가 될까~ 부모님들은 방어기전을 발휘한다. 나의 개인적인 생각도 글과 마찬가지고 면역력이 생기려면 조금 더러운 것도 만지면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아이들 키우면서 생긴 버릇이 주위에 놀이터를 찾는 것이다. 호준이의 자유로운 신체활동을 위해서도 있지만 내가 조금 더 쉬기 위해서~ 그냥 관찰만 하고 있으면 되니~ 집에서 하는 활동보다는 훨씬 수월하기에~ 호준이도 놀이터에 자주 놀다보면 꼭 미끄름틀을 내려가고 나서 올라가려는 경향이 있어 참 제지하기가 힘들다. 마음같아서는 그냥 내버려두고 싶지만 미끄름틀위에는 올라가지 마시오~라고 딱 써있으니 그리고 다른 아이들과의 충돌도 유려되기에 할 수 없다. 다른 부모님들도 다 내 마음과 같을 것이라 생각한다. 편쌤과 글에서 쓰신 것 처럼 오르내릴 수 있는 미끄름틀이 참 필요한 것 같다.
3. 무장애놀이터는 차별이다
편쌤에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무장애놀이터라는 단어가 있으므로써 더 편견이 생기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장애 비장애 아이들이 그냥 자주보고 놀 수 있게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중요하지 휠체어 그네 하나 달랑 하난 놓고 무장애 놀이터라고 생색내며 기사화 하는 것은 반갑지가 않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없애기 위해서는 아이들이 일상생활에서 자연스럽게 노는 것이 답인 듯 하다.
질문
1. 조금 지저분 한 환경에서 놀아서 면역력이 높아진다는 것? 과학적인 근거가 있을까?
2. 놀이터 운동장에 타성포장을 하는 것은 무슨 계기로 시작되었을까? 업자들은 돈을 얼마나 벌었을까?
황폐한 어린이 놀이터, 비좁게 뒤섞어 만들어 놓은 놀이터 -> 참신한 놀이터 만들기 흐름이 기쁘다. 놀 시간을 주자 , 어린이 놀이터는 한 나라 ‘상상력’과 ‘공공성’의 잣대이자 출발
2. 시끄럽고 어지르고 더러워지고 다치고
어린이 스스로 돌보며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놀이터 문화 만들기 -> 놀이터시민네트워크
위생 관념 때문에 생기는 도시 아이들의 심각한 면역력 저하 -> 맨발로 흙과 모래 밟기
3. 공공형 어린이 실내놀이터
첫째, 도시에서 놀 공간이 없다, 둘째, 밖에 나가 놀 수 있는 날이 적다, 셋째, 상업적 실내놀이터 이용 부담이 너무 커 생기는 어린이 놀이기회의 불평등이 심각
4. 아이가 아이 마음으로 살 수 없다면
백석 ‘여우난 곬족’(아이 놀이의 르네상스, 아이가 노는데 진정 필요한 것은 또래, 놀 곳, 스스로 놀 수 있는 놀잇거리가 넘치고, 시간이 넉넉하다), 권정생 ‘운동장’(운동장이 아이들의 어머니), 이지 ‘분서- 동심설’(동심은 어떻게 사라지는가?)
5. 슬라이드(slide)인가 클라임(climb)인가
놀이터에 관해 이야기 할 때: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노는 것을 3년이라도 봤어야 한다. 그래야 조금씩 놀이터의 원리와 온기와 생기와 자유의 공기를 느낄 수 있다. 몸짓과 소리로 알아차릴 수 있다.
왜 놀이터에 오나, 왜 못오나, 왜 가나? 쉽고 단순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
6. 나무를 쓰면 생태놀이터일까
생태: 세상과 자연에 대한 태도와 조화-> 생태란 자기 사는 곳 가까이 있는 환경
놀이터는 소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풍부한 놀이기회가 가능하도록 합목적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7. 무장애놀이터는 차별이다
일반 아이들이 함께 어울려 놀 수 있는 놀이터가 필요하다. 장애와 비장애는 자주 길게 만나야 한다. 놀이터 콘셉트와 기능을 선전할 것이 아니라 진정 아이가 그곳에 와서 어떤 ‘사회적 소통’을 할 수 있는지 깊이 살펴야 한다. ‘이동권’이 먼저고 ‘머물권’이 보장
8. ‘흙산 놀이터’ 만들기 운동을 제안하며
아이들은 흙무더기 하나면 모자라지 않는다. “아이들은 몇 시간이라도 몰입해 놀 수 있어요”
아이들한테 노는 시간을 정해 주는 순간 아이들 놀이는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멈춘다. 이것은 유아들이 언제 속 깊은 놀이를 끝없이 이어가는지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아 가까이 있는 분들이 아이들의 놀이를 편안한 마음으로 넉넉한 시간 속에서 볼 수 있을 때 아이들의 자유놀이는 꽃을 피울 수 있다.
9. 탄성포장과 조합놀이기구
놀이터 짓는 비용의 대부분
10. 옮기고 망가뜨리고 파괴할 수 있는 놀이터가 필요하다.
MAKE 시대: 나와 우리와 공동체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스스로 연구하고 만들어 쓰는 문화가 놀이터에 도착
대안놀이터, 적정놀이터, 공유놀이터, 전환놀이터, 모험놀이터... 사는 곳 가까이 있는 안 쓰는 재료와 간단한 연장과 도구를 가지고 아이들과 이웃이 어울려 뚝딱거려 만드는 놀이터... 상주 백운초등학교 뒷마당 놀이터... 적정 또는 모험놀이터 -> 함께 만들어 함께 논다는 철학이 모험놀이터 공동체에 공유되는 것이 먼저 필요 -> 지원이 없어도 공동체가 모험 놀이터를 유지,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 일시적 완성이 아닌 여러 해 조금씩 만들어 가는 모험놀이터 철학이 긴요한 까닭이다.
11. PLAY BOX
가장 큰 장애: 분실과 관리... 작은 놀잇감들을 놀이터에서 만나는 것이 필요하다는 긍정 필요
어떻게 이것을 이용하는 아이나 어른에게 공공의 물건이라는 것을 알릴 것인지 지혜를 찾아야 한다. 놀이상자의 확대는 공공놀이터에서 어린이와 시민에 대한 신뢰의 첫걸음
12. 놀이터 스폰서를 경계하라
놀이터 민영화 -> 국가, 행정, 시민, 어린이가 만들고 가꿀 주제 -> 치고 빠지는 얄팍함이 아니라 머물고 가꾸는 든든한 아이들의 놀이벗 필요
13. 위기의 놀이터, 추방에서 환대로, 라지에서 미니멀로
아이들이 너무 바빠 놀이터에 도무지 갈 수 없다. 미세먼지로 인해 안심하고 나갈 수 없다. 디지털과 아날로그, 가상과 현실, 상상과 몸의 균형이 무너짐, 놀이문화의 실제적 붕괴
하나, 놀이터는 잃어도 자유놀이는 찾자!:
1) 개별 놀이터 만들기에서 한 도시의 놀이터 생태계를 만들어야... 마을이나 동이나 구나 한 도시의 놀이터를 조망할 수 있는 역할을 민간 쪽에서 살피고 맡는 것이 필요, 놀이터 생태계 시민 네트워크
2) 기구 위주의 놀이터에서 놀이 위주의 놀이터로
3) 모방하지 말고 지역의 개성이 살아 있는 놀이터로... 놀이터 활동가의 중요성
4) 어린이 참여 디자인, 책임 있는 퍼실리테이터 또는 디자이너와 균형점을 찾아야
5) 향후운영과 관리에 대한 예산과 인력 계획을 꼼꼼히 마련해야... 정성스러움이 있어야 처음의 상태가 유지될 수 있다.
둘, 추방에서 환대로!: 기존의 놀이터가 쫓아낸 놀이가치들을 하나씩 부르고 찾아 돌아오게 하자. (물, 불, 언독, 흙, 진흙, 모래, 개울, 나무, 바위, 동무, 시간, 내달리기, 숨는 곳, 쉬는 곳, 더러워지는 거, 소란스러움, 다치는 것, 높이, 속도, 위험 등)
셋, ‘놀이격차’를 근본적으로 해소하라!: ‘꿈을 담은 놀이터’(서울시 교육청), 플레이스타트 운동(시흥시 보건소 건강도시과), 놀이혁신위원회... 비구조화되고 어린이의 자유의지에 뿌리를 둔 ‘자유놀이’와 놀이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는 ‘놀이권’으로 나아갈 것인지 철학적, 사상적으로 가늠할 수 있는 위원회로 자리매김... 실행기구... 말이 앞서는 코치가 아닌, 놀이를 배급하듯 나눠 주는 시혜 방식이 아닌, 어린이 가까이서 그들의 플레이그라운드를 알뜰히 가꿀 실천과 운동이 필요, 놀이형평성 중요.
14. 놀이터가 없어도... 어린이의 놀이는 돈과 무관하다.
닐 포스트먼 <사라지는 어린이>... 훈련이 놀이를 대신, 놀이를 누려야 할 어린이들이 직업의 세계를 만나고 있다.
제인 제이콥스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 아이를 키우는 것은 놀이터가 아니라 골목과 거리... 최고의 놀이와 놀이터는 친구이고 부모이고 이웃이고 거리다.
에드 메이오, 애그니스 네언 <컨슈머 키드>... 기업의 마케팅 승리... 놀이실종과 결핍유도, 그것에 유인된 어린이에게 놀이 대용품을 만들어 집어삼키며 놀이상실의 시대를 즐긴다.
귄터 벨찌히 <놀이터 생각>... 놀이와 놀이터에 대한 철학... 재미없는 놀이는 일이고 재미있는 일은 놀이입니다!... 놀이터는 필요 없다... 아이들에게는 이 세상 모두가 놀이터여야 한다는 말... 나는 아직 좋은 놀이터가 무엇인지도 그런 놀이터를 만들지도 못했다... 거듭 볼 뿐이다.
아이들은 오늘도 말을 듣지 않고, 경계를 넘고, 불편한 것을 선택하고, 관리를 용인하지 않고, 균질하지 않은 대지로 뛰쳐나가고, 위험을 무릎 쓰고 감행한다. 그런 아이가 지금 분명히 존재한다. 이 아이들을 어떻게 헤아리고 사랑할 것인가.
<느낀점>
진짜 놀이터란 어떤 곳일까? 이 세상 모든 곳이 놀이터다. 세상 어느 곳이든 아이들은 친구와 놀잇감만 있으면 스스로를 돌보며 맘껏 놀 수 있는 놀이터로 만든다. 그런 아이들은 도시화란 명목으로 놀이터 감옥에 가두어 키우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이다. 그렇게 알록달록한 놀이터를 어른들 눈에 좋게 만들어 놓고 어른들은 만족해 하지만 정작 아이들은 재미도, 모험도, 만족도 느낄 수 없다. 시끄럽게 놀 수도 없고, 어지를 수도 없고 더럽힐 수도 없고 맘껏 망가뜨리고 파괴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는 충분한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예전 어느 학교 운동장에 공사를 하고 남은 흙더미가 있었다. 엄마들과 모임을 마치고 나오니 아이들이 그곳에서 흙과 물로 엄청나게 집중하며 노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엄마들은 한동안 그들 곁에서 그들이 노는 모습을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정말 흙산 하나면 아이들에겐 충분하다.
코로나 상황 속에서 많은 제약이 있지만 아이들이 가정에서 자유놀이를 충분히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 같다. 가정마다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고 우리의 선입견과 두려움을 나눈다면 집콕 놀이터를 아이들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아이들을 지원하고 환경을 가꿔 주는 것이 부모들, 이웃 아줌마, 아저씨의 역할인 것 같다.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시기는 아이가 어렸을 때 잠깐이다. 이 소중한 시간을 아이들과 함께 잘 가꿔 가면 좋겠다. 그렇게 내 가정에서 아이가 맘껏 놀 수 있도록 하고, 두 세 가정이 끈끈하게 연결되어 온,오프라인으로 놀면서 관계를 맺어 가고,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가까운 공원이나 놀이터에서 만나 신나게 뛰어 놀 수 있으면 참 좋겠다. 부모가 잘 돌보지 못하는 아이 한 두명을 함께 품어 보는 것은 어떨까? 시흥시 보건소의 플레이스타트 운동과 숨쉬는놀이터를 소개해주셔서 감사했다.
<질문>
176-177. 이지는 분서- 동심설에서 동심이 사라진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당신은 어떻게 동심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는가?
(아날로그로 한 시절을 보내야 하는 까닭)을 읽고 잊고 있었던 나의 어린시절이 떠올랐다. 앞으로는 동해바다와 뒤로는 설악산을 뒤로 한 산촌 마을에 자리잡았던 나의고향은... 사계절의 옷은 갈아입지만, 한결같이 그 자리를 유지하며 어린 날의 내게는 너무도 지루하기 그지없는 풍경이었던 것 같다. 세 남매의 교육을 위해 여러농사일을 마다하지 않으셨던 부모님은 벼농사와 밭농사 그리고 작은 과수원까지 관리하셨기에 눈코 뜰 새없이 바쁘셨다.
그 안에서 나는 종종 거리며 벌레를 잡는 병아리가 커서 암탉이 되고 암탉이 낳은 따뜻한 알의 온기를 느끼며 자라 날 수 있었다. 어느날인가는 학교에서 알이 깨지고 처음 보는 존재가 엄마라고 인식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엄마 닭이 자리를 비운틈을 타서 알을 깨고 나오는 병아리를 가로챈 적도 있었다.
가을이면 밥대신 철에 나오는 과일을 먹으며 끼니를 대신한 적도 많았다. 껍질채 그냥 먹어도 되지만, 항상 얇고 길게 깍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느꼈던 것도 같다. 수확철이 지나면 아빠는 그 중 두꺼운 나무 둥치에 밧줄을 묶어 그네를 만들어 주시곤 했다. 그네보다는 나무위에 기어올라가 내가 얼마나 키가 커졌는지 더 높이 오르면 가지가 부러지지 않을지 아슬아슬한 도전을 많이도 해 봤었다.
겨울이 되면 창고 옆의 비료푸대를 타고 놀다가 뾰족하게 나와있던 나뭇가지에 똥꼬가 쓸려 고생했던 동생 생각도 난다.
어른 들은 눈을 쓸고 치우고 우리는 강아지와 더불어 이글루를 만든다고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놀았었다.
아날로그로 한 시절을 보냈던 내가 아이들에게 경험을 공유해 줄 수는 있지만, 내 아이들은 이런 시절로 돌아 갈 수 없음이 마음이 아프다.
사회 변화 속에서 그 흐름을 타는 것이 쉽기에 많은 생각을 하지 않으면 자연스러운 선택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생각을 하고 더 나은 환경을 주기 위해 조그마한 다른 선택을 해 나가며 최선을 다해 보는거죠... 시골에 산다고 그런 삶이 보장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시골도 사교육으로 바쁘게 지내는 분들이 많더라구요. 지금 내게 주어진 환경에서 다른 선택 무엇 하나를 시도해 보는 것이 출발이지 않을까요? 편샘이 저희 부부가 놀이터를 가꾸는 모습을 보시며 시골과 도시가 중요하지 않다 하시더군요^^ 하하
저는 봄비의 유년시절이 정말 너무 부럽네요. 대신 딸은 저와는 다른 풍요로운 놀이 환경을 누려 다행인 것 같아요^^ 하하
[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 4장- ‘놀이는 아이 안에 있다’를 읽고
<함께 읽고 싶은 문장>
거친 몸싸움 놀이를 권하며
229. 놀다가 숱하게 져도 보고 죽어도 봐야 한다. 악다구니를 끝까지 써보기도 하고 제힘이 얼마 정도인지 한껏 써볼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것 저런 것을 다 못하게 막기만 하면 아이들은 몸 안에 힘을 쌓아 놓을 수밖에 없다. 쌓아 놓은 힘이 임계치를 넘으면 밖으로 터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거친 몸싸움이야말로 아이들한테 꼭 필요하고 여러 어려운 상황이지만 허용해야 할 중요한 놀이다. 기다리면서 가까이 지켜보면 아이들의 거친 몸싸움 놀이라는 것이 어떤 선을 넘고 있지 않음이 보일 것이다. 거친 몸싸움 놀이를 지금보다 좀 더 넉넉히 허용했을 때다. 무기력과 좌절에서 벗어나 어떻게 회복력과 탄력을 몸과 마음에 담을 것인지 거친 몸싸움 놀이에서 그 실마리를 만나길 바란다. 아이들끼리 깐죽거리고 티격태격하는 것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놀며 삼매에 들다
231. ‘깍두기’는 요즘으로 치면 약자에 대한 배려이고 관용이며 나아가 모두가 평등한 출발에 서기까지 기다려 주는 사려 깊은 마음씀씀이다.
233. 공기놀이에 빠지다 보면 어느새 공기놀이의 재미를 지나 깊은 평화로움과 만나기도 한다. 공기놀이의 재미를 지나 깊은 평화로움과 만나기도 한다. 공기놀이에 몰입된 아이들을 보면 마치 깊은 명상 속 삼매에 빠진 듯이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바로 이때 아이들은 두려움과 걱정의 찌꺼기를 태운다. 그리고 놀이가 끝났을 때 아이는 놀이 이전의 아이와 아주 다른 존재로 태어난다. 자 어떻게 놀지 않고 아이들의 영혼이 날마다 푸를 수 있겠는가. 하루를 잘 논 아이는 짜증을 내지 않는다. 10년을 잘 논 아이는 마음이 건강하다.
더워도 밖에서 추워도 밖에서
238. 요즘 아이들은 어떤가. 마당과 골목과 동무를 잃어버려 놀이의 공간과 시간과 관계는 손톱만큼 작아졌고, 어려서부터 엄마 아빠의 집요한 간섭과 기획과 상품 광고와 연예 산업의 표적이 되어 자란다... 자극적인 시각과 청각의 강렬함에서 벗어나려면 몸의 세계, 다시 말해 놀이의 세계와 앞서 만나야 한다.
239. 어려서 즐겁게 놀았던 유년의 기억이 어른이 된 나를 지금껏 밀어가는 바닥나지 않는 힘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릴 때 놀던 힘을 꺼내 오늘을 산다. 그런데 마음껏 놀지 못한 우리 아이들은 이 불확실의 세상을 무슨 힘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놀지 못해 마음마저 아프고 몸은 시들어 가는데 말이다.
242. 실내에서 하는 이런저런 얄궂은 칠교니 산가지니 하는 깨작깨작하는 놀이를 내던지고 우비에 장화를 신고 물, 불, 바람, 흙 속에서 아이들은 세상과 만나야 한다. 진정한 놀이는 아이들이 아주 오랜 옛날부터 있었던 것들과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예를 들어 추위, 더위, 비바람, 집 밖에서 하룻밤 보내기, 밤길 걷기, 비 맞기, 눈구덩이에 구르기 등등의 것들이 아이들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아하는 놀이다.
자본에 가장 극력하게 저항하는 길
252. 자본과 싸우려면 잘 놀아야 한다. 이 싸움이 놀이가 될 때 우리는 자본을 이긴 것이나 다름없다. 자본에 가장 극렬하게 저항하는 것 또한 잘 노는 것이다.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놀 줄 알아야 한다. 이런저런 장난감과 게임기, 스마트폰, 노래방 탬버린을 내려놓고 맨손으로 놀 수 있어야 한다... 자본에 빼앗긴 놀이와 낭만을 되찾아 오자.
253. 간교하고 잔혹한 자본의 세계와 가장 잘 맞서는 사람은 분명코 놀 줄 아는 사람이리라. 놀 줄 아는 어린이 아이를 놀게 할 수 있으리라. 기억하라. 노는 것을 잊어버린 아이거나 지금 놀 때가 아니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노예라는 것을...
‘놀이밥’ 한 그릇
아이는 한가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이는 마음껏 뛰놀 수 있는 곳이 필요합니다.
아이는 함꼐 놀 수 있는 동무가 있어야 합니다.
놀 틈, 놀 터, 놀 동무가 있어도 허용하는 마음이 없으면 아이는 놀 수 없습니다.
하루 두세 시간씩 ‘놀이밥’을 꼬박꼬박 먹습니다.
이제 ‘자유놀이’의 고향으로 돌아가자
유아교육의 떠나온 고향을 찾아서: 아이들이 스스로 하고 싶은 놀이를 막고 거꾸로 인지나 학습과 연결하려 한다면 교사는 오히려 아이들의 놀이를 방해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렇듯 놀이를 학습의 보조도구로 쓰는 경우가 유아교육 현장에서 자주 보인다. 이것은 아이들 놀이를 타락시키는 것이고 그 결과 학습의 가치를 강요하는, 쉽게 말해 결코 놀이라 할 수 없는 것을 놀이라 우기는 것이다.
2. 놀이는 누가 선택하고 아이들은 정말 노는가: 놀이에서 스스로 놀고 싶어 논다는 자기결정이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표어에 그치고 있다. 가슴 아픈 것은 아이들은 그런 생각을 잊어 가고 있고, 교사는 오늘도 내일 아이들과 무엇을 할 것인지 아이들의 ‘놀이욕구’와 상관없이 이런저런 것을 뒤져 계획을 세우느라 너무 피곤하고 바쁘다는 점이다... 어떤 놀이를 하며 하루를 보낼 것인가에 대한 교사와 아이들이 조화로운 대화를 꽃피울 수 있는 곳으로 어린이집과 유치원이 바뀌기를 바란다. 이런 자유놀이가 가능하려면 무엇보다 교사에게 ‘자유’가 주어져야 함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3. 놀이가 크게 달라지는 시기와 까닭: 4세에서 5세로 넘어가는 아이들이 이 시기에 말이 빠르게 는다. 이 즈음 이야기를 듣는 힘도 아주 커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놀이와 말’ 또는 ‘놀이와 이야기’가 함께 나란히 간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놀이와 말 또는 이야기는 아주 긴밀한 관계 속에서 발전한다는 점이다.
4. 놀잇감, 장난감, 교재교구를 보는 새로운 눈: 사람과 사람이 아이들과 아이들이 만나는 놀이를 밀어내고 교재교구라 이름 붙은 물건을 가지고 노는 것이 유아교육에서 생각하는 놀이라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일이다. 어디까지나 교재교구는 아이들끼리 흠뻑 놀고 난 다음에 시간이 그래도 남으면 하는 ‘두 번째 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비고츠키가 말했던 것처럼 아이와 아이, 아이와 부모, 아이와 교사가 서로 주고받는 상호작용이 없다면 추상의 세계로 나가는 능력은 생기기 어렵다... 한국의 유아교육은 실내에서 실외로, 교사의 선택에서 아이의 자유놀이로, 장난감에서 놀잇감으로 대 전환이 절박하다. 이렇게 서서히 꾸준히 ‘자유놀이’라는 유아교육의 고향으로 돌아가자. 만약 유아와 함께 ‘자유놀이’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유아의 몸과 마음이 멍들고 개정 누리과정은 정처 없이 떠돌 것이다.
아이는 노는 데 도가 터야 한다
267. 왜 요즘 아이들은 그렇게 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울고불고 분통을 터뜨리는 것일까... 아이들이 그동안 놀이다운 놀이를 해본 경험이 너무 적은 탓이다... 그렇게 하면서 놀이 밖 현실에서 겪는 거절과 좌절의 경험을 즐기고 이겨내는 힘을 기른다. 놀이는 그래서 참 중요하다... 함께 놀며 아이들은 화를 다스리고 다음을 기다리고 감정 표현을 늦추는 법을 스스로 배우며 ‘긍정’에 도착한다. 요즘 아이들이 ‘자기통제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까닭은 바로 놀이의 양적 결핍에 원이인 있음을 분명히 말하고 싶다.
269. 아이들 노는 것을 지켜보다 보면 끼어들어야 하나 내버려 두어야 하나 갈등하게 되는 대목과 맞닥뜨릴 때도 있다. 이때 ‘끼어들기’나 ‘멈추기’보다는 ‘바라보기’나 ‘이어주기’나 ‘함께하기’의 길을 찾아보기를 권하고 싶다. 아이들과 함께 놀 때 어른 스스로 완전히 아이가 되어 몰입하는 경우부터 나 몰라라 방관자에 이르기까지 그 폭은 꽤 넓다. 중요한 것은 놀이를 이끌기를 멈추고, 놀이 할 수 있는 환경을 가꿔 주고, 놀이를 이어주고, 아이들이 잘 어울릴 때 빠지고, 아이들이 같이하자고 할 때 함께하는 열린 태도 그 어디쯤일 것이다. 아이와 놀려면 한없이 유연해야 한다. 아이들이 타고난 것이 둘 있다. 하나는 놀이고 또 하나는 부지런함이다. 아이들은 이 둘을 합쳐 놀이에 도가 트는 것이다. 참말이다
놀이가 아이 안에 소복이 있어요
271. 아이들과 놀이 속으로 들어가 함께 놀지 못하고 가르치려고만 드는 교사는 불행하다... 지금은 내가 먼저 나서 놀자고 하는 일이 없으니 그렇게 마음 편할 수가 없다. 놀이가 나에게 있는 게 아니라 아이 안에 소복이 있다는 것을 긴 공부 끝에 깨우쳤기 때문이다.
272. 놀이는 가르칠 수 없다. 아이 안에 놀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책을 펴놓고 배울 수도 없다. 오로지 놂으로 느낄 수 있고 그 재미있고 따뜻하고 때론 흥분되는 느낌을 아이들과 나눌 수 있다. 놀려면 놓여나야 한다. 놀려면 교사와 아이들의 일상을 붙잡고 있는 이런저런 것들에서 놓여나야 한다.
272. 슈타이너는 아이들에 대해서 공부할 수 있는 책은 없다고 했다. 아이들을 책으로 삼아 배워야 한다는 말이다. 놀이 또한 마찬가지다. 제대로 놀려면 놀이하는 방법과 차례가 적힌 책과 재주와 기술을 내던져야 한다.
273. 놀이보다 중요한 것은 놀다가 생기고 쌓이고 오가는 따뜻한 눈빛과 사랑과 이해와 우정이다... 사랑은 말로 마음에 새기기 어렵다. 교사와 부모와 아이들이 놀이를 가운데 두고 서로 부대껴야 사랑의 싹을 틔울 수 있다... 그때그때 상황을 놀이로 여기고 앞에 있는 것들을 가지고 즐겁게 놀 수 있다면 그만이다. 노는 시간이 바로 사랑을 나누는 가장 충실한 시간이다.
274. 놀이는 우정과 사랑, 웃음과 울음이 빠지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그리고 그 놀이는 아이 밖에 있지 않고 아이 안에 가득하다... 놀이는 아이 안에 있고 아이는 놀면서 마침내 자기가 된다.
아이의 놀이가 멈추면 아이의 숨도 멈춘다
275. 공터와 골목이 사라지면서 놀이가 사라지고 담 너머 시끄럽던 아이들 소리도 이제 듣기 어렵다. 그 많던 아이들은 뿔뿔이 건물 속으로 사라졌고 바깥놀이터에서도 아이들 보기가 쉽지 않다.
아이들과 아이들 문화에 관심이 많은 분들조차도 아이들에게 좋은 책을 만나게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지 밖에서 뛰노는 것이 먼저라고 애써 말하는 사람은 적다.
277. 대한민국에 뿌리내린 신자유주의라는 것이 아이들을 얼마나 빠르게 기운 없고 생기 없고 웃음 없이 만드는지 아시아와 중동의 여러 골목을 헤매며 절감했다... 대한민국 아이들은 몸과 마음의 건강이 썩 좋지 않다... 그러나 신나게 뛰어놀며 생명의 기운을 몸 안에 가득 담는 아이는 거친 환경과 음식 앞에서 쉬이 쓰러지지 않는다. 놀이는 아이들을 살려 내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279. 이렇게 어린 시절부터 끔찍한 경쟁의 한복판에서 자라는 우리나라 아이들이 다른 세상의 아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것이 쉽지 않아 보인다.
아름다운 것, 새로운 것, 이로운 것을 만든 것은 언제나 놀이다. 아이들은 놀면서 생명의 아름다움에 눈뜨고, 새로운 낯선 세계로 발을 옮기고 그 속에서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 무언가를 창조하는 데 이렇듯 꼭 있어야 할 놀이와 생기를 아주 어려서 거세당한 아이들이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일에 서툰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280. 아이들을 놀게 내버려 두시라. 어려서 마음껏 놀았던 아이는 결코 스스로를 해치지 않는다. 놀지 못하면 아이는 마음이 굳고, 놀이를 빼앗기면 아이의 몸은 무너진다. 하지마! 만지지마! 가지마! 조심해! 위험해! 올라가지마! 뛰지마! 울지마! 마! 마! 마! 이렇게 아이의 놀이와 자유가 멈추면 아이의 피도 숨도 멈춘다. 그 길로 정녕 기야 하는가.
아이들 편을 들자 아이들 편에 서자
281. 아이들은 말을 못하니 세상이 어른들 마음대로다.
‘진짜 놀이’도 ‘가짜 놀이’도 없다
284. 실내에서 기획된 체험과 성인이 미리 선택한 놀이를 하도록 한 것은 아니었는지 물을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그런 ‘체험의 공간에 재미와 즐거움과 놀이의 자유가 있어서 유아들이 그렇게 양적으로 많이 왔던 것인지 아니면 그런 곳만 만들다 보니 그런 곳밖에 갈 수 없어서 이용 유아가 많았던 것인지 냉철해져야 한다.
285. 아이 안에 놀이의 씨앗이 있음을 한없이 긍정하는 것이다... 유아가 자신 속에 있는 놀이의 씨앗을 볕 잘 드는 곳에 꺼내 놓고 물을 주고 가꾸어 가는 것을 거드는게 우리의 존재 이유이고 우리의 즐거움이고 환희라는 것을 잊지 말자... 그 많은 혼란과 비효율과 과도한 비용 낭비와 실내 집중과 체험의 과잉이 사실은 ’놀이가 아이 밖에 있다‘는 망상에서 출발해서 생긴 지루한 해프닝이었음을 깨우쳐야 한다.
287. 유아교육에서 말하는 놀이는 ’철저한 자유놀이 그 자체‘다. 한국 유아교육은 떠내려 온 시절을 되짚어 올라가 ’자유와 놀이‘라는 발원지를 찾기를 바란다.
아이는 놀 때 가장 쉽게 배운다
289. 세상 곳곳의 아이들이 그들이 타고난 결대로 살 수 있도록 곁에서 나란히 걷는 사진가로 살면서 세상의 아이들을 좀 더 넓고 깊게 만나고 싶다.
하루를 잘 논 아이는 짜증을 모르고, 10년을 잘 논 아이는 명랑하다
아이들은 이렇게 멸종하는가?: 타인인 아이를 향한 강요는 부모 스스로의 인간성을 황폐화시킬 것이다. 좋은 부모는 가장 적게 요구하는 부모이고, 진정 좋은 부모는 요구하지 않는 부모다. 부모가 물러설 때 아이는 나아간다... 아이가 다시 일어서 가려면 이 아이한테는 무엇이 튼실하게 자리 잡고 있어야 할까. ’되살아나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놀이다.
게임과 소셜미디어는 아이들의 노동이 되었다: 아이들은 그동안 놀지 못한 놀이에 허기가 져 게임에 빛과 같은 빠르기로 입문하는 것이다. 이를 바로잡으려면 빼돌리고 빼앗은 ’놀이‘를 제자리로 돌려놓는 일과 ’극단적 이윤 추구‘라는 천박한 게임의 본지에 관한 무자비한 비판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한다.
조금 더 더럽고 시끄럽고 어지르며 키우자: 아이들이 마음껏 뛰고 소리 지르고 웃고 울부짖게 말이다. 건강한 아이는 늘 바쁘다. 조그만 내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바빴냐 하면 뭘 하고 놀아야 할지 모를 만큼 놀 게 많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놀고 잠잘 때 자란다... 대부분 부모가 집에 없다. 먹는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유기농도 친환경도 아닌 누구랑 먹느냐다. 혼자 밥 먹기만큼 사람을 피폐하게 만드는 것도 없다. 이것은 혼자 놀기의 어려움을 짐작하면 이해할 수 있다. 골방에서 유기농 혼자 먹어서 무슨 큰 이로움이 있을까.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바른 먹을거리를 먹지 못하고 또 학원에서 학원으로 옮아간다. 대한민국의 아이들은 유아에서부터 청소년 때까지 십수 년을 이렇게 떠돌며 멸종해 가고 있다. 분명 아동기와 그들의 놀이는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아이들은 간섭과 제지와 금지로부터 해방시키자: 밖에 나갔더니 우리 아이와 함께 놀 아이들이 없다고 하지 말고 먼저 내 아이와 함께 밖으로 나가길 바란다. 그렇게 누군가 나와서 놀고 있다면 다른 집 부모도 자기 아이의 손을 잡고 나올 것이다. 같은 또래 아이들을 키우는 옆집 부모와도 손을 잡지 못하게 만드는 이 자본의 경재와 소외와 분열에 맞서는 용기와 저항이 진정 필요하다. 그리고 그 싸움 자체가 우리의 즐거움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자본에 가장 격렬하게 저항하는 길 또한 우리 어른도 아이도 재미있게 노는 것이다... 앞에서 놀아야 이긴다고 했다. 더불어 안 사야 이긴다. 그리고 마침내 자본에 이기려면 외롭고 고독하고 쓸쓸하고 가난해야 한다... 성장을 멈춘 일상 속에서 아이들과 함께 가난하고 소박한 ’놀이의 길‘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권정생의 ‘엄마 까투리’를 읽고
318, 그렇게 엄마 까투리는 온몸이 바스라져 주저않을 때까지 새끼들을 지켜 주고 있었습니다.
에필로그: 놀이 박탈의 시대, 아이에게 더 많은 자유놀이와 상상놀이를!
어린이의 한 시절이 사라졌다.
321. 아직 놀이에 대한 오해의 그늘은 넓고 짙다. 놀이는 현실 속 쓸모 있는 것들 다음으로 차례가 밀리고, 낭비로 보며, 배움과 대척점에 있다는 사고가 어린이 가까이에서 여전히 작동되고 있다.
놀이란? 자신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즐기며 몸에 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322. 사회적 거리 두기가 놀이와 우정과 거리 두기로 이해되거나 대체되거나 오용되는 것에 눈을 부릅떠야 한다. 놀이의 가치는 위기가 깊어질수록 점점 더 차례가 밀리고 저평가되고 무가치하고 무모한 영역으로 취급받고 있다. ’놀이운동‘은 이렇게 손발이 잘리고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포박당한 채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323. 전염병 예방에 대한 정보 전달과 대처는 어린이의 활동을 통한 일상적 건강 돌봄과 균형을 이뤄야 마땅하다. 놀이를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학교와 교사와 보호자에게 없다... 이렇게 코비드 19는 놀이의 시대를 ’반 놀이의 시대‘로 아무런 저항 없이 그것도 아주 빠른 속도로 퇴행시켰다.
’놀이의 길‘을 찾아 나서자
대한민국 어린이 놀이환경의 실제적 민낯은 코비드 19로 비대면이 강제된 현제 상황과 견주어 그리 다르지 않다는 냉철한 인식이 필요하다.
대한민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놀이와 놀이터와 놀이권 관련 개인이나 단체나 기관에 공공재로서의 ’기본놀이‘ 개념을 제안한다. 이것은 ’기본소득‘개념에 빚진다... 놀이를 기본소득의 중요한 축인 ’사회권‘의 하나로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 놀이 위기 속에서 길을 잃지 않는 데 매우 유용하다고 본다.
코비드-19가 한창인 상시적 위기의 시대에 ’자유놀이‘와 만나는 행운을 어린이와 함께 누기리길 권한다... 어린이는 이 가혹한 시기를 보내면서 건강한 몸도 건강한 마음도 모두 잃을 수 있다. 위기의 시대, 어린이에게 허용적 태도와 자유놀이가 더욱 풍성해야 하는 ᄁᆞ닭이다. 특히 성인 주도 놀이활동에 신중해야 한다. 이런 시기일수록 성인 주도 활동이 어린이의 자기주도적 활동을 마비시켜 더욱 우울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이는 지금 더 ㅁ낳은 자유놀이와 상상놀이가 절실하다.
온라인 놀이터를 애써 활용하는 방법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안에서 바깥으로의 과감한 이동과 전환이다... 어떠한 경우라도 위험에 대한 지나친 걱정과 공포에 어린이의 놀이와 자유가 일방적으로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가장 중요한 놀이 철학임을 분명히 밝힌다.... 더 나아가 가장 일상적이고 이동할 필요가 없으며 특별한 놀이공간을 만들지 않아도 가능한 놀이 장소인 ’홈과 하우스‘가 마른 하늘에 날벼락처럼 어린이 가까이서 놀이환경을 고민하는 양육자와 보호자에게 발견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 가까운 이웃과의 교류를 통한 상호의존성 또는 상호연결성’ 또한 이참에 공부가 필요하다. 홈과 하우스야말로 최고의 놀이터인데 이 점을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지나치게 간과하고 있다... ‘Street Play’ 운동 시민모임... 길거리 놀이터 운동.
6. 어린이 스스로 선택하고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기후 위기 속 놀이의 길과 삶의 길을 오늘 성실히 찾아야 한다. 코비드-19와 동거하며 어린이와 함께할 최소한의 ‘놀이의 길’을 알뜰히 찾아 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기후 위기를 맞는다면 놀이를 잃는 것 뿐 아니라 우울과 불안을 넘어 절망과 체념을 지나 두려움과 공포에 갇히게 될 것이다. 그 길은 앞서 있었던 익숙한 길이 아니고 새로 개척해 가는 놀이의 길일 것이다. 물론 기후 위기를 늦추고 막기 위한 행동에 놀이도 놀이터도 놀 권리도 동행해야 마땅하다.
좋은 상황이 오기만을 기다리지 말고, 대면 상황이 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잠시라도 날씨가 좋아 밖에 나갈 수 있는 상황이 온다면, 어린이가 밖으로 나가 놀고 싶다면, 수업 중이라도 시험 중이라도 즉시 나가서 놀이의 시간과 포옹해야 한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를 놀이기회를 다음으로 미루지 말고 즉각 하던 일을 멈추고 밖으로 나가 놀 수 있는 예민함과 기민한 전환과 결정의 대담함이 어린이와 보호자와 교사 모두에게 도착했다. 교육은 텅 빈 운동자와 자연을 양육은 홈과 하우스와 거리를 재발견해야 한다.
어린이는 질병과 위험과 위기 속에서도 알고 선택하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하고, 어린이는 헤아리고 선택하고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다. 나는 이 명제를 권정생 선생님께 배웠다. 어린이가 그런 선택과 판단을 스스로 할 수 있는 환경을 가꿔 주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라 믿는다.
<느낀점>
책을 읽으며 마음에 와 닿는 구절들이 많아 글을 옮겨 치다보니 내용이 너무 많아졌다. 글을 다 쓰고 그 내용을 다시 요약해 키워드로 노트 한 바닥에 적어 보았다.
‘거친 몸싸움, 삼매, 깍두기, 두려움과 걱정의 찌꺼기 태우기, 돈 한 푼 드리지 않고 놀기, 놀지 못하면 노예, 허용, 자유놀이의 고향, 자기 통제력, 사라지는 아이들, 타고난 결, 되살리는 힘, 예방과 돌봄의 균형, 홈과 하우스, 이웃과 상호 의존성, 상호 연관성, street play,’
저자는 아이 안에 놀이가 소복이 있음을 강조하며 언급한 대목이 있다.
‘아이들이 타고난 것이 둘 있다. 하나는 놀이고 또 하나는 부지런함이다. 아이들은 이 둘을 합쳐 놀이에 도가 트는 것이다. 참말이다.’(p269)
놀이 박탈 시대를 맞이한 아이들을 위해 절박한 심정으로 여러 제안을 하고 있다. 특히 저자가 언급한 예민함, 기민한 전환, 결정의 대범함은 인상 깊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를 놀이기회를 다음으로 미루지 말고 즉각 하던 일을 멈추고 밖으로 나가 놀 수 있는 예민함과 기민한 전환과 결정의 대담함이 어린이와 보호자와 교사 모두에게 도착했다.’(p336)
눈이 오는 날이면 플레이스타터들은 어김없이 아이들과 밖으로 나가 노는 모습이 단톡방에 올라온다. 아이들을 놀 수 있게 하려고 애쓰는 이들을 보며 마음이 따뜻해진다.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도구를 사용하며 풍성한 놀이를 할 수 있도록 ‘집콕 모험놀이터’를 기획하고, ‘리사이클링 플레이’ 릴레이 영상을 찍기도 한다. 최근에는 아이들에게 ‘야외 모험놀이터’를 만들어 주고 싶어 지역 주민들과 회의를 시작하고 반년 동안 스터디를 진행하며 자신들의 자녀들과 시범 운영을 하고 하반기에 뜻있는 주민들의 참여를 제안할 예정이라고도 한다. 우리 플레이스타터들이 저자가 마지막에 언급한 권정생 선생님의 <엄마 까투리> 속 어미 새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들 곁에서 그들이 꿈꾸고 소망하는 것을 든든히 지원하는 행정과 시민의 다리 역할을 해 나가고 싶다.
<질문>
올해 당신은 나의 자녀와 우리의 아이들의 놀이 환경을 가꾸기 위해 무엇을 기획하고 계시나요?
4장 의견 나눔
이슬>
어렷을적 놀이안에 자연스레 존재하던 깍두기에 관심과 배려의 철학이 들어있다는 본질적인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책을 읽고 나서 아이들이 놀이의 삼매에 빠져있을 때, 그리고 나의 안전에 대한 걱정으로 인해 아이의 경험과 기회가 단절되지 않도록 지켜봐주고 있다.
웃음>
책을 읽으면서 지금까지 아이들을 키워온 아이들과 열심히 놀았던 나 자신을 칭찬도 하고(아이들이 어릴 때 밤 늦게까지 놀았는데, 그 때는 함께 했던 가족이 있어서 가능했다.), 위험에 있어서 걱정이 앞서 못하게 했었던 안타까운 부분도 있었다.
봄비>
경기도 사업에서 만났던 깍두기 역할을 했던 친구와의 에피소드 공유
'꼬마야 꼬마야'를 꼭 성고하고 싶다는 깍두기 친구를 기다려주었더니 결국 성공했다. 그 친구를 보고 긴 줄이 무서워 잘 도전하지 않았더던 봄비도 도전하여 성공해서 무척이나 뜻깊은 경험이었다고 얘기해주셨다.
다다>
아이들을 학원으로 보내는 이유중에는 아이들의 안전이 걱정되는 부모의 마음이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사회가 안전하다면..안전하게 놀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아이들을 놀 수 있도록 내보낼 수 있지 않을까?
밍키>
죽음과 부활, 회복력과 탄력, 놀이와 게임, 장난감과 놀잇감에 대한 생각들을 했고, 아이들과 만남에 있어 각지 놀이에 대한 철학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밍키가 던진 "책읽기와 글쓰기는 놀이로 어울린 다음에 두 번째로 해도 된다."와 "거친 몸싸움"에 대한 이야기
예삐-책 읽는 모임을 10년 동안 해왔는데, 책도 좋지만 놀고 관계를 맺는 것이 중 요하다고 생각한다. 놀다놀다 심심하면 보는 것이 책이라면 좋겠다.
몸은 부딪히며 다양한 감각들이 발생하는데 요즘 친구들은 안전과 코로나로 인해 육체가 닿는 감각들을 경험하지 못한다. 이러한 경험들을 해봐야 아는 것들이 있지 않을까?
다다-부모님들과 학교의 반대
누군가 나를 칠 수 있다는 경험, 맞아보는 경험, 그 경험들을 통한 힘 조절과 그 상황을 잘 해결하는 요령들을 요즘 아이들은 경험하지 못한다.
봄비-'정답은 없다'라는 책 내용 공유
독서는 간접경험으로 한계가 있다. 간접은 직접을 뛰어넘을 수 없다. 아이들 에게 여백이 필요하다.
중3아이와 9살 아이가 몸싸움을 했는데 처음에는 말렸으나 나중에는 서로 조심하면서 몸싸움을 하는 아이들을 볼 수 있었다.
마음-마음이의 경험을 공유
몸싸움은 아이들의 기본적인 욕구라고 생각한다. 무조건 안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이의 성향을 파악하는 것이 먼저인 것 같다.
4장 놀이는 아이안에 있다
함께 하고 싶은 문장>
p231 깍뚜기
이쪽과 저쪽으로 나누어 겨루는 놀이를 할 때, 어리건 몸이 약한 아이를 깍두기로 뽑아 놀이 속에 끼워 주는 관심과 배려의 철학이 오롯이 녹아있는 말이다. 따지고 보면 이 깍두기는 아직 놀이에 어설픈 아이들이 바로 놀이속으로 들어왔을 때 겪을 수 있는 실패와 좌절을 줄여주는 완충 역할을 훌륭히 했다.
p238
우리는 놀았다. 우리끼리 놀았다. 잘 놀았다. 온종일 놀았다. 더워도 추워도 놀았다. 꼭 밖에서 놀았다. 어려서는 할머니 할아버지 무릎이 놀이터였고 조금 커서는 온 산동네가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멀리 야산에 가서도 놀았고 까마득히 높은 축대에서 뛰어내리는 위험한 모험도 겁없이 감행했다. 그러나 오래 앓는 아이가 적었다.
p269
'끼어들기'나 '멈추기'보다는 '바라보기'나 '이어주기'나 '함께하기'의 길을 찾아보기를 권하고 싶다.
놀이를 이끌기를 멈추고, 놀이를 할 수 있는 환경을 가꿔주고, 놀이를 이어주고, 아이들이 잘 어울릴 때 빠지고, 아이들이 같이하자고 할 때 함께하는 열린 태도 그 어디쯤을 것이다.
p299
아이들은 놀아야 한다. 놀아야지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고 또 잘하는지 알 수 있다. 놀면서 땀을 흘려야 한다. 덥다고 에어컨 앞에만, 춥다고 온실 안에만 있으면 아이들은 체온 조절능력을 잃어버리고 이것은 곧 자율신경의 균형을 무너뜨려 질병에 이르게 한다. 이 땀은 아이들의 성실함과 하고자 하는 열망을 만드는데 없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아아들을 조금 더 더럽게 밖에 내놓고 키울 일이다. 탈탈 털어키우면 아이가 약골이 된다. 덧붙이자면 좀 더 소란스러운 곳도 필요하고, 좀 더 어질러진 곳도, 좀 더 위험한 환경도 필요하다. 꼭 필요하다.
느낀 점 & >
글을 읽는 동안 아이들을 어떻게 하면 놀 수 있게 할 수 있을까란 생각을 참 많이도 했다.
요즘같은 세상에 하교 후 아이들이 끊임없는 스케줄은 내(부모)가 없는 동안 아이의 안전이 걱정이 되는 부모들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부모들이 걱정하지 않고, 아이들이 자유롭게 놀 수 있는 시간을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역 주민들의 관심? 세상 어두운 것들로부터 안전한 공간? 아이들을 지켜봐주는 어른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등....
생각이 많아지는 마지막이었다.
3장 놀이터를 비워야 아이는 그곳을 놀이로 채운다.
함께 하고 싶은 문장>
p201 자본의 한복판을 사는 놀이터 벗들이여! 우리는 아이들 일을 하는 사람답게 튼튼하게, 민망하지 않게, 빨리 멋지게 하려 하지 말고 작고 오래 할 생각을 해야 한다.
p222 아이들이 놀고 싶어 곧 죽겠다는 것을 알야차려야 할 때
몸을 비비꼬고 비틀 때
앉았다 일어났다 할 때
돌아다닐 때
딴청을 부릴 때
창 넘어 먼 곳을 볼 때
밖과 닿아 있는 창문을 자꾸 바라볼 때
하품을 할 때
짜증을 부릴 때
말을 안들을 때
혼자 떠들 때
함께 떠들 때
투정을 부릴 때
던질 때
망가뜨릴 때
옆 친구를 툭툭칠 때
위험하고 거친 행동을 할 때
말없이 주위를 맴돌 때
싸울 때
소리 지를 때
울 때
이 때는 온 몸으로 밖에 나가 놀고 싶다는 아이의 간절한 호소이니 번개처럼 알아차리고 행동해야 한다. 부디 외면하지 말자. 이런 상황과 맞닥뜨리면 당장 하던 일을 멈추고 놀이를 허용해야 한다. 아이들은 시간이 없어서 장소가 없어서 친구가 없어서 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허용'이 없어 놀지 못한다. 부디 더 허용해야 아이도 어른도 살 수 있다. 어제보다 오늘, 오늘 보다 내일 조금 더 허용해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이 자란다.
3장
P197 play box
공공장소인 놀이터에 이런 놀이함을 설치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분실과 훼손과 관리의 문제 제기다. 먼저 이런 놀이함이 놀이터에 왜 필요한지 가까이 사는 분들과 공유가 앞서야 한다.
P205 위기의 놀이터,추방에서 환대로
라지에서 미니멀로
각각의 놀이터가 특징이 없어 이용하는 아이들의 지루함이 극에 다다르게 만들어 오히려 위험하다. 지루하니 놀이기구를 다르게 쓰고 싶은 욕구가 생길수밖에 없다.
느낀점
놀이터 마다 사실 다 똑같다...
내가봐도 뻔한 놀이터 ~
"테마"가 있는 놀이터가 있다면
이동네 에서도 놀고 저동네 에서 놀고
흥미로운 놀이터가 될것 같다.
질문
영유아 놀이터는 많은데요
청소년들들도 숨쉴수 있는 놀이터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3장 <놀이터를 비워야 아이는 그곳을 놀이로 채운다>
p176 아이들 마음, 동심이란 무엇일까.
무릇 동심이란 진실한 마음이다. 만약 동심이 불가능하다고 한다면, 이것은 진실한 마음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동심이란 거짓을 끊어 버린 순진함으로 사람이 태어나서 처음 가지게 되는 본마음을 말한다. 동심을 잃게 되면 진심이 없어지고 진심이 없어지면 진실한 인간성도 잃는다. 사람이라도 진실하지 않으면 처음의 본마음을 다시 회복할 수 없다. 어린아이는 사람의 처음 모습이고, 동심은 사람의 처음 마음이다. 처음 마음이 어찌 없어질 수 있는가? 그렇지만 동심은 왜 갑자기 없어지는 것일까?
~느낀점 : 동심은 없어지는 게 아니라 삶과사회 속에 길들여지며 잠시 잊혀지는 게 아닐까?
아날로그로 한 시절을 보내고 지루하게 느껴졌던 적막강산을 벗어나 이런 삶이 진정한 삶이 아닐까?를 생각하며 자유와 모험속에 어리기도 하고 젊었던 나를 그 안에 집어 던졌었다.
사랑이라 믿었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20대 후반과 30대를 지날 즈음에는 삶의 무게에 짓눌려 하루하루가 버겁기만 했던 날들도 보냈었다.
그 시절 아이들을 위해 읽어주었던 그림책을 만나면서 잊고있었던 나의 동심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 중 내게 큰 변화를 주었던 다시 상상의 날개를 돋게 만들었던 책이 <나니아 연대기>였다. 처음 이 책이 출판되었을 때 세상사람들은 아이들이 너무도 좋아해서 놀랐고 가까운 사람들은 c.s 루이스의 개인사로 놀랐었다.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없는 그가 어떻게 아이들이 이토록 환호하는 책을 만들어냈을까? 하는 점이었다. 그건 루이스가 자신의 어린시절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한다.
우리가 어린시절의 기억들을 루이스의 말처럼 나이테와 같이 기억하며 성장한다면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질문 : 나이테와 같이 기억하며 성장하는 방법이란?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함께 하고픈 문장
1. 시끄럽고 어지르고 더러워지고 다치고
세상은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이 함께 공존한다. 아이들은 그사이에서 살아간다. 약간의 더러움과 오염에 노출이 절대적으로 아이에게 필요하다. 특히 어린 시기에 맨발로 흙과 모래를 밟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면역과 운동능력을 높이는 가장 손쉬운 일임을 알아야한다. 아이들이 놀다가 더러워지고 소란스럽고 어지르고 다치는게 놀이다. p169
2. 슬라이드인가 클라임인가
전 세계의 아이들은 오늘도 수없이 미끄럼틀을 거술러 기어 오른다. 제도와 놀이욕구의 심각한 불일치다. 제도와 놀이욕구의 심각한 불일치이다. 놀이기구 이름은 아이들을 길들인다. 놀이기구의 쓰임과 재미와 빈도로 보았을 때 이 놀이기구의 이름은 ‘오르내림틀’이 맞지 않을까? 폭 넓은 오르내림틀은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p.180
3. 무장애놀이터는 차별이다
무장애놀이터를 별도의 공간에 강조해 만들고 홍보할 일이 아니라 모든 공공놀이터가 장애 아이들이 쉽게 와서 비장애 아이들과 함께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순서다. 중략~ 장애 아이들과 일반 아이들이(비장애 아이들 이렇게 쓴다고 합니다) 함께 어울려 놀 수 있는 놀이터가 필요할 뿐이다. 장애와 비장애는 자주 길게 만나야 한다. 그렇게 만날 수 있는 곳이면 그곳이 둘 모두에게 최고의 놀이터다.
타성포장과 조합놀이기구
맨 앞에서 가로막고 있는 물리적 장애물과 상상의 장애물이 있으니 그것이 탄성포장과 조합놀이기구이다. 이 둘은 놀이터 비용을 독차지한다. 이 둘을 그대로 두고는 놀이터 상상력을 마음껏 펼 수 없다. 더불어 기존의 놀이기구 위주의 놀이터에서 자유놀이 위주의 놀이터를 구상하는 놀이터 철학이 재정립되어야한다.
느낀점
요즘은 너무 미세먼지가 많다보니 청정을 요구되는 시대이다. 장소나 공간이 더러워도 아이에게 피해가 될까~ 부모님들은 방어기전을 발휘한다. 나의 개인적인 생각도 글과 마찬가지고 면역력이 생기려면 조금 더러운 것도 만지면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아이들 키우면서 생긴 버릇이 주위에 놀이터를 찾는 것이다. 호준이의 자유로운 신체활동을 위해서도 있지만 내가 조금 더 쉬기 위해서~ 그냥 관찰만 하고 있으면 되니~ 집에서 하는 활동보다는 훨씬 수월하기에~ 호준이도 놀이터에 자주 놀다보면 꼭 미끄름틀을 내려가고 나서 올라가려는 경향이 있어 참 제지하기가 힘들다. 마음같아서는 그냥 내버려두고 싶지만 미끄름틀위에는 올라가지 마시오~라고 딱 써있으니 그리고 다른 아이들과의 충돌도 유려되기에 할 수 없다. 다른 부모님들도 다 내 마음과 같을 것이라 생각한다. 편쌤과 글에서 쓰신 것 처럼 오르내릴 수 있는 미끄름틀이 참 필요한 것 같다.
3. 무장애놀이터는 차별이다
편쌤에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무장애놀이터라는 단어가 있으므로써 더 편견이 생기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장애 비장애 아이들이 그냥 자주보고 놀 수 있게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중요하지 휠체어 그네 하나 달랑 하난 놓고 무장애 놀이터라고 생색내며 기사화 하는 것은 반갑지가 않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없애기 위해서는 아이들이 일상생활에서 자연스럽게 노는 것이 답인 듯 하다.
질문
1. 조금 지저분 한 환경에서 놀아서 면역력이 높아진다는 것? 과학적인 근거가 있을까?
2. 놀이터 운동장에 타성포장을 하는 것은 무슨 계기로 시작되었을까? 업자들은 돈을 얼마나 벌었을까?
3. 장애 비장애 아동들이 놀이터를 잘 이용하기 위한 환경은 무엇일까?
[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 3장]- 오명화
<내용 정리>
1. 놀이터를 바꿔야 아이가 산다.
황폐한 어린이 놀이터, 비좁게 뒤섞어 만들어 놓은 놀이터 -> 참신한 놀이터 만들기 흐름이 기쁘다. 놀 시간을 주자 , 어린이 놀이터는 한 나라 ‘상상력’과 ‘공공성’의 잣대이자 출발
2. 시끄럽고 어지르고 더러워지고 다치고
어린이 스스로 돌보며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놀이터 문화 만들기 -> 놀이터시민네트워크
위생 관념 때문에 생기는 도시 아이들의 심각한 면역력 저하 -> 맨발로 흙과 모래 밟기
3. 공공형 어린이 실내놀이터
첫째, 도시에서 놀 공간이 없다, 둘째, 밖에 나가 놀 수 있는 날이 적다, 셋째, 상업적 실내놀이터 이용 부담이 너무 커 생기는 어린이 놀이기회의 불평등이 심각
4. 아이가 아이 마음으로 살 수 없다면
백석 ‘여우난 곬족’(아이 놀이의 르네상스, 아이가 노는데 진정 필요한 것은 또래, 놀 곳, 스스로 놀 수 있는 놀잇거리가 넘치고, 시간이 넉넉하다), 권정생 ‘운동장’(운동장이 아이들의 어머니), 이지 ‘분서- 동심설’(동심은 어떻게 사라지는가?)
5. 슬라이드(slide)인가 클라임(climb)인가
놀이터에 관해 이야기 할 때: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노는 것을 3년이라도 봤어야 한다. 그래야 조금씩 놀이터의 원리와 온기와 생기와 자유의 공기를 느낄 수 있다. 몸짓과 소리로 알아차릴 수 있다.
왜 놀이터에 오나, 왜 못오나, 왜 가나? 쉽고 단순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
6. 나무를 쓰면 생태놀이터일까
생태: 세상과 자연에 대한 태도와 조화-> 생태란 자기 사는 곳 가까이 있는 환경
놀이터는 소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풍부한 놀이기회가 가능하도록 합목적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7. 무장애놀이터는 차별이다
일반 아이들이 함께 어울려 놀 수 있는 놀이터가 필요하다. 장애와 비장애는 자주 길게 만나야 한다. 놀이터 콘셉트와 기능을 선전할 것이 아니라 진정 아이가 그곳에 와서 어떤 ‘사회적 소통’을 할 수 있는지 깊이 살펴야 한다. ‘이동권’이 먼저고 ‘머물권’이 보장
8. ‘흙산 놀이터’ 만들기 운동을 제안하며
아이들은 흙무더기 하나면 모자라지 않는다. “아이들은 몇 시간이라도 몰입해 놀 수 있어요”
아이들한테 노는 시간을 정해 주는 순간 아이들 놀이는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멈춘다. 이것은 유아들이 언제 속 깊은 놀이를 끝없이 이어가는지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아 가까이 있는 분들이 아이들의 놀이를 편안한 마음으로 넉넉한 시간 속에서 볼 수 있을 때 아이들의 자유놀이는 꽃을 피울 수 있다.
9. 탄성포장과 조합놀이기구
놀이터 짓는 비용의 대부분
10. 옮기고 망가뜨리고 파괴할 수 있는 놀이터가 필요하다.
MAKE 시대: 나와 우리와 공동체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스스로 연구하고 만들어 쓰는 문화가 놀이터에 도착
대안놀이터, 적정놀이터, 공유놀이터, 전환놀이터, 모험놀이터... 사는 곳 가까이 있는 안 쓰는 재료와 간단한 연장과 도구를 가지고 아이들과 이웃이 어울려 뚝딱거려 만드는 놀이터... 상주 백운초등학교 뒷마당 놀이터... 적정 또는 모험놀이터 -> 함께 만들어 함께 논다는 철학이 모험놀이터 공동체에 공유되는 것이 먼저 필요 -> 지원이 없어도 공동체가 모험 놀이터를 유지,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 일시적 완성이 아닌 여러 해 조금씩 만들어 가는 모험놀이터 철학이 긴요한 까닭이다.
11. PLAY BOX
가장 큰 장애: 분실과 관리... 작은 놀잇감들을 놀이터에서 만나는 것이 필요하다는 긍정 필요
어떻게 이것을 이용하는 아이나 어른에게 공공의 물건이라는 것을 알릴 것인지 지혜를 찾아야 한다. 놀이상자의 확대는 공공놀이터에서 어린이와 시민에 대한 신뢰의 첫걸음
12. 놀이터 스폰서를 경계하라
놀이터 민영화 -> 국가, 행정, 시민, 어린이가 만들고 가꿀 주제 -> 치고 빠지는 얄팍함이 아니라 머물고 가꾸는 든든한 아이들의 놀이벗 필요
13. 위기의 놀이터, 추방에서 환대로, 라지에서 미니멀로
아이들이 너무 바빠 놀이터에 도무지 갈 수 없다. 미세먼지로 인해 안심하고 나갈 수 없다. 디지털과 아날로그, 가상과 현실, 상상과 몸의 균형이 무너짐, 놀이문화의 실제적 붕괴
하나, 놀이터는 잃어도 자유놀이는 찾자!:
1) 개별 놀이터 만들기에서 한 도시의 놀이터 생태계를 만들어야... 마을이나 동이나 구나 한 도시의 놀이터를 조망할 수 있는 역할을 민간 쪽에서 살피고 맡는 것이 필요, 놀이터 생태계 시민 네트워크
2) 기구 위주의 놀이터에서 놀이 위주의 놀이터로
3) 모방하지 말고 지역의 개성이 살아 있는 놀이터로... 놀이터 활동가의 중요성
4) 어린이 참여 디자인, 책임 있는 퍼실리테이터 또는 디자이너와 균형점을 찾아야
5) 향후운영과 관리에 대한 예산과 인력 계획을 꼼꼼히 마련해야... 정성스러움이 있어야 처음의 상태가 유지될 수 있다.
둘, 추방에서 환대로!: 기존의 놀이터가 쫓아낸 놀이가치들을 하나씩 부르고 찾아 돌아오게 하자. (물, 불, 언독, 흙, 진흙, 모래, 개울, 나무, 바위, 동무, 시간, 내달리기, 숨는 곳, 쉬는 곳, 더러워지는 거, 소란스러움, 다치는 것, 높이, 속도, 위험 등)
셋, ‘놀이격차’를 근본적으로 해소하라!: ‘꿈을 담은 놀이터’(서울시 교육청), 플레이스타트 운동(시흥시 보건소 건강도시과), 놀이혁신위원회... 비구조화되고 어린이의 자유의지에 뿌리를 둔 ‘자유놀이’와 놀이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는 ‘놀이권’으로 나아갈 것인지 철학적, 사상적으로 가늠할 수 있는 위원회로 자리매김... 실행기구... 말이 앞서는 코치가 아닌, 놀이를 배급하듯 나눠 주는 시혜 방식이 아닌, 어린이 가까이서 그들의 플레이그라운드를 알뜰히 가꿀 실천과 운동이 필요, 놀이형평성 중요.
14. 놀이터가 없어도... 어린이의 놀이는 돈과 무관하다.
닐 포스트먼 <사라지는 어린이>... 훈련이 놀이를 대신, 놀이를 누려야 할 어린이들이 직업의 세계를 만나고 있다.
제인 제이콥스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 아이를 키우는 것은 놀이터가 아니라 골목과 거리... 최고의 놀이와 놀이터는 친구이고 부모이고 이웃이고 거리다.
에드 메이오, 애그니스 네언 <컨슈머 키드>... 기업의 마케팅 승리... 놀이실종과 결핍유도, 그것에 유인된 어린이에게 놀이 대용품을 만들어 집어삼키며 놀이상실의 시대를 즐긴다.
귄터 벨찌히 <놀이터 생각>... 놀이와 놀이터에 대한 철학... 재미없는 놀이는 일이고 재미있는 일은 놀이입니다!... 놀이터는 필요 없다... 아이들에게는 이 세상 모두가 놀이터여야 한다는 말... 나는 아직 좋은 놀이터가 무엇인지도 그런 놀이터를 만들지도 못했다... 거듭 볼 뿐이다.
아이들은 오늘도 말을 듣지 않고, 경계를 넘고, 불편한 것을 선택하고, 관리를 용인하지 않고, 균질하지 않은 대지로 뛰쳐나가고, 위험을 무릎 쓰고 감행한다. 그런 아이가 지금 분명히 존재한다. 이 아이들을 어떻게 헤아리고 사랑할 것인가.
<느낀점>
진짜 놀이터란 어떤 곳일까? 이 세상 모든 곳이 놀이터다. 세상 어느 곳이든 아이들은 친구와 놀잇감만 있으면 스스로를 돌보며 맘껏 놀 수 있는 놀이터로 만든다. 그런 아이들은 도시화란 명목으로 놀이터 감옥에 가두어 키우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이다. 그렇게 알록달록한 놀이터를 어른들 눈에 좋게 만들어 놓고 어른들은 만족해 하지만 정작 아이들은 재미도, 모험도, 만족도 느낄 수 없다. 시끄럽게 놀 수도 없고, 어지를 수도 없고 더럽힐 수도 없고 맘껏 망가뜨리고 파괴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는 충분한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예전 어느 학교 운동장에 공사를 하고 남은 흙더미가 있었다. 엄마들과 모임을 마치고 나오니 아이들이 그곳에서 흙과 물로 엄청나게 집중하며 노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엄마들은 한동안 그들 곁에서 그들이 노는 모습을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정말 흙산 하나면 아이들에겐 충분하다.
코로나 상황 속에서 많은 제약이 있지만 아이들이 가정에서 자유놀이를 충분히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 같다. 가정마다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고 우리의 선입견과 두려움을 나눈다면 집콕 놀이터를 아이들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아이들을 지원하고 환경을 가꿔 주는 것이 부모들, 이웃 아줌마, 아저씨의 역할인 것 같다.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시기는 아이가 어렸을 때 잠깐이다. 이 소중한 시간을 아이들과 함께 잘 가꿔 가면 좋겠다. 그렇게 내 가정에서 아이가 맘껏 놀 수 있도록 하고, 두 세 가정이 끈끈하게 연결되어 온,오프라인으로 놀면서 관계를 맺어 가고,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가까운 공원이나 놀이터에서 만나 신나게 뛰어 놀 수 있으면 참 좋겠다. 부모가 잘 돌보지 못하는 아이 한 두명을 함께 품어 보는 것은 어떨까? 시흥시 보건소의 플레이스타트 운동과 숨쉬는놀이터를 소개해주셔서 감사했다.
<질문>
176-177. 이지는 분서- 동심설에서 동심이 사라진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당신은 어떻게 동심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는가?
2장 <아이는 무엇으로 사는가?>
(아날로그로 한 시절을 보내야 하는 까닭)을 읽고 잊고 있었던 나의 어린시절이 떠올랐다. 앞으로는 동해바다와 뒤로는 설악산을 뒤로 한 산촌 마을에 자리잡았던 나의고향은... 사계절의 옷은 갈아입지만, 한결같이 그 자리를 유지하며 어린 날의 내게는 너무도 지루하기 그지없는 풍경이었던 것 같다. 세 남매의 교육을 위해 여러농사일을 마다하지 않으셨던 부모님은 벼농사와 밭농사 그리고 작은 과수원까지 관리하셨기에 눈코 뜰 새없이 바쁘셨다.
그 안에서 나는 종종 거리며 벌레를 잡는 병아리가 커서 암탉이 되고 암탉이 낳은 따뜻한 알의 온기를 느끼며 자라 날 수 있었다. 어느날인가는 학교에서 알이 깨지고 처음 보는 존재가 엄마라고 인식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엄마 닭이 자리를 비운틈을 타서 알을 깨고 나오는 병아리를 가로챈 적도 있었다.
가을이면 밥대신 철에 나오는 과일을 먹으며 끼니를 대신한 적도 많았다. 껍질채 그냥 먹어도 되지만, 항상 얇고 길게 깍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느꼈던 것도 같다. 수확철이 지나면 아빠는 그 중 두꺼운 나무 둥치에 밧줄을 묶어 그네를 만들어 주시곤 했다. 그네보다는 나무위에 기어올라가 내가 얼마나 키가 커졌는지 더 높이 오르면 가지가 부러지지 않을지 아슬아슬한 도전을 많이도 해 봤었다.
겨울이 되면 창고 옆의 비료푸대를 타고 놀다가 뾰족하게 나와있던 나뭇가지에 똥꼬가 쓸려 고생했던 동생 생각도 난다.
어른 들은 눈을 쓸고 치우고 우리는 강아지와 더불어 이글루를 만든다고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놀았었다.
아날로그로 한 시절을 보냈던 내가 아이들에게 경험을 공유해 줄 수는 있지만, 내 아이들은 이런 시절로 돌아 갈 수 없음이 마음이 아프다.
질문 : 나의 선택이었을까? 아님 사회의 요구였을까?
이런 핑계로 나는 숨어버리고자 함일까?
다시 돌아 갈 순 없을까?
시골로 내려간다면 이런 생활이 가능할까?
네. 알겠습니다. 볕은 따뜻해도 바람이 많이 차갑네요. 다니시면서 건강조심하시구요. 금요일에 뵐 수 있으면 그 때 뵙고 마음이님의 마음과 서늘하지만 꼭 필요한 이야기들 또 들려주셔요^^
다음주를 어찌 될지 몰라 4회기 까지 미리 올립니다.~~
양해 부탁 드려요~~~
오늘도 플스 선생님들~~ 건강 조심하시고~~ 행복 많이 쌓으세요~~~
플스-글쓰기 4
4 놀이는 아이 안에 있다.
나누고 싶은 글 -
* 241P
또 어느 해인가는 마음이 힘든 아이들과 우연히 맞닥뜨려 놀았던 적이 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이 아이들하고 어떤 놀이를 해야 할지 떠오르는 것이 없어
속이 새까맣게 탔다..............................................................................
아이들을 둘러 보았더니 그 가운데 한 아이가 혼자 큰 물통의 물을 튕기는 것을 보였다 다가가 그 아이에게 물을 튕겼다 그렇게 한아이와 물을 튕기는 것을
장난으로 시작한 것이 나중에는 물싸움으로 번지고 마침내 둘레가 온통 물바다가 되어서야 끝났다.
* 242P
물, 불, 바람, 흙 속에서 아이들은 세상과 만나야 한다...................
아이들이 놀기에 좋지 않은 날은 없다.~~
마음이의 생각 한 줄 -
19년도에 플스 4기에 지원한 적이 있었다.
그때 우연히 한조에 인연이 되었던 분이 지역에 돌봄을 운영하게 되었다고 내게 프로그램 요청이 들어왔었다.
나는 각종 재료로 함께 점심을 만들어 먹고~ 물, 불, 나무, 물감을 가지고 아이들이 최대한 자유롭게 놀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았다.
불을 피울수는 없으나 나무에 인두를 이용해 원없이 태우는 놀이는 아이들이 열광하고 희열을 느끼며 기뻐했고~~ 교육원 앞 뒤 데크에 파란통 빨간통
아이스박스까지 동원해 물을 받아 마음껏 물을 뒤집어쓰고 놀았던 놀이는 아이들이 지금도 할수 없냐며 물어보는 놀이이다.
나는 그날 아이들과 놀고난후 홀딱 젖은 옷 덕분에 사타구니가 옷에 쓸려
헤어지는 아픔을 몇날 겪어야 했지만 그날의 아이들의 환호는 아직도 내 가슴을 뛰게하고 그 아이들의 웃음은 아직도 나를 흥분하게 한다.
나는 아이들의 웃음이 좋다. 하얀 이를 마음껏 드러내고 달랑거리는 목젓이
보이도록 고개를 뒤로 젖히며 배꼽을 부여잡고 데굴데굴 구르며 두 눈에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며~~~ 배 근육에 놀라 오줌을 찔끔 거릴 때까지
웃어 젖히는 아이들이 보고 싶어~~ 그 아이들의 목청이 듣고 싶어
나는 플스가 되기로 했다.~~
마음이의 궁금증 -
어떻게 하면 온~~ 나라에 아이들의 웃음을 전파 할수 있을까요? *^^*
플스-글쓰기 3
3 놀이터를 비워야 아이는 그곳을 놀이로 채운다.
나누고 싶은 글 -
* 165p
한국의 어린이 놀이터를 보면 현제도 그렇지만 앞으로 우리의 상상력이
얼마나 바닥을 헤멜지 헤아려져 때때로 마음이 무겁다.
* 169p
세상에는 더러운것과 깨끗한 것이 함께 공존한다.
아이들은 그 사이에서 살아 간다.
약간의 더러움과 오염에 노출이 절대적으로 아이에게 필요하다.
특히 어린시기에 맨발로 흙과 모래를 밟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면역과
운동능력을 높이는 가장 손쉬운 방법임을 알아야 한다.
* 175p
운동장은 우리들의 키을 크게하고 우리들의 몸을 튼튼하게 하고
우리들의 뼈를 굵게하고 공부에 지친 머리를 낮게하고
우리들의 마음씨를 예쁘게 바르게 키워준다.
마음이의 생각 한줄 -
몇 년전 우연히 지역 주민참여 예산위원을 하게 되면서 동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주민참여예산위의 일은 나라에서 각지역에 주어지는 예산중
지역민의 민원이나 불편한곳에 예산우선순위의 투표를 진행하고 주민들의 의견을 모아주는 중간다리의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현장 실사를 하면서 우리지역에 그렇게 많은 놀이터가 있는줄 나는 몰랐다.
그런데 그 놀이터들의 모양이 정말 복사, 복사, 복사였다.
나는 건의 했다. 놀이터 마다 테마를 만들어 특화를 시키면 안되냐고~
물론~~ 씨알도 안먹혔다. ‘관리.예산.민원.위생등등’
열받아서 내가 만들어야겠다 마음 먹었다. ^^
우리아이는 태어날때부터 숨겨진 아토피에 알러지가 있었다.
3년을 몸관리를 하고 건강체크를 하고 식이요법까지 하며 얻은 아이이기에
당연히 모유수유까지 가려 했으나 안타깝게도 모유수유만 하면 하혈을 하는 바람에 3개월 만에 수유를 접어야했다
문제는 아이가 시중에 나오는 분유에 알러지 반응을 보여 먹을수가 없었다.
덕분에 아이는 3개월부터 쌀로 만든 암죽으로 생활을 했다.
자라면서 아이는 유독 음식에 민감하여 외식을 할수 없었고 결국 아이가 3돌이 될 무렵 나는 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앞에 텃밭 200평을 빌려서 밭농사를 시작하고 작은 농부가 되었다.
아이는 어린이집을 가는 오전 시간을 제외하면 밭에와서 딩굴고 넘어지고
각종 벌레를 집어놀며 해질때까지 시간을 보내며 놀았다.
어느날 인가~~ 텃밭에서 풀을 메고 있는데 아이가 나를 부르며 조심조심
걸어 오고 있었다. ‘잉? 어린이집 안 끝났을 텐데. . . ’
한참을 기다린 내게 조심조심 소중하게 두손으로 건낸 것은 어린이 집에서
간식으로 나온 아기주먹만한 고구마 한 개와 우유였다
“엄마 배 고플까봐~~~ 나만 먹으면 엄마 배 고플까봐~~” 그리고 뒤뚱뒤뚱 걸어가는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며 너무 고맙고 감사해서 참~ 많이도 울었다.
그렇게 자란 아이가 중3이 되었고 지금 우리 아이에게 아토피는 없다.
우리 몸속에 좋은균이 더욱 건강 하고 튼튼해지려면 나쁜균이 있어야 경쟁을 통하여 좋은균이 더욱 발전 하지 않을까?
언제부턴가 우리주변에 흙먼지 일으키는 운동장은 찾아보기 힘들어 졌다.
아이들이 먼지를 마셔서 건강에 해롭다고 ~~ 넘어져서 피부가 까져 다친다고 등등의 이유로 초록초록 푸른 인조 잔디로 바뀌어 갔다.
어느순간 !!!!!
인조 잔디 때문에 화상을 입는다~~ 발암 물질 때문에 몸에 안좋다 등등
다시 갈아 엎어서 바꾸어 달라고 한다. 시간낭비, 돈낭비, 자원낭비에 폐기물까지~~ 아이들이 쓰는곳을 아이들이 누리는 공간이 왜? 학부형들의 민원에 좌지 우지 되는지~~ 정~~~~~~~~~~말 궁금하다.
마음이의 궁금증 -
아이들이 쓰는곳을 아이들이 누리는 공간이 왜? 학부형들의 민원에 좌지 우지 되는지~~ 정~~~~~~~~~~말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