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갑과 모자를 쓰고 뒤돌아보니, 늦장부리기 대장 둘째가 모래놀잇감을 한 손에 들고 기다리고 있다.
1층에 도착하자마자 “와~!” 소리와 함께 집 앞 놀이터를 향해 뛰어가는 아이들.
아이들은 모래놀잇감으로 눈을 퍼 담느라 정신이 없다. 바닥에 쌓인 눈을 통 안에 퍼서 담고, 손으로 쓸어보고, 발로 밟아 보고, 눈 미끄럼을 타보고...2월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눈을 마냥 즐기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놀이밥을 선택한 나 스스로에게 흐뭇한 마음이 든다.
‘역시 밥 중에 밥은 놀이밥이지!’
“어떤 아이스크림 드실 거에요?”
“초코렛을 뿌려 놓은 거에요.”
아이들은 눈으로 자신들이 제일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만들고 있다. 하얀 눈에 고명처럼 나름 정성스럽게올려놓은 모래알갱이들...
‘어떻게 모래를 초코렛으로 생각했지?’
아이의 깜찍한 아이디어에 미소가 살며시 떠진다.
그러나 그 마음도 잠시뿐 ... 아이들이 노는 것을 마냥 서서 지켜보는 나에게는 영하 10도의 바람이 너무 차다. 핸드폰 시간을 확인하는 간격이 점점 짧아지더니 참지 못하고 나오는 현실 엄마의 잔소리.
“아 추워! 얘들아 이제 들어가자. 이제는 밥 먹어야지.”
고개를 들어 쳐다보지도 않고, 눈놀이 무아지경에 빠진 아이들.
“그럼 엄마만 들어간다...더 놀고 들어와.”라는 협박성 말을 하고 아파트 현관으로 향하는 나.
밥먹고 나면 집앞 놀이터로 뛰어 나가 놀고 학교같다오면 책가방을 던져놓고 나가노는것이 일상이였다.
뒹구는 나무 막대기가 못생긴 돌맹이도, 지천에 널려 있던 흙들이 무엇이든 놀이감이 되었고 동네 빨래터가, 오질개(오디)가 열리는 앞산이, 묘가 있어 잔디가 깔려 있는 뒷도 어디든 나의 놀이터가 되었다.
특별하다고 여기지 않았기에 잊혀져 있던 놀이가 아이가 태어나고 아이가 자라다 보니 잊혀있던 놀이가 다시 생각이 난다. 그 때의 기억들이 다시 생각이 난다.
건강한 몸을 만들게 했고, 나의 생각을 만들어 주던 놀이가 더 특별하고 더 소중하게 다가오기에 내 아이에게 놀이는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릴적과는 다르게 지금의 놀이는 특별한거가 되어버렸다. 놀이의 시간은 하루 많은 일과 중에서 시간을 허락해주어야만 주어지는 시간이 되어 버렸다.
특별한 장난감 없어도 놀수 있던 놀이가 돈을 주고 산 장난감이 있어야만 놀수 있는 놀이가 되어 버렸다. 친구가 있어야만 놀수 있었던 놀이가 친구가 없어도 놀수 있는 놀이가 대부분이 되어 버렸다.
아이만의 공간인 놀이터가 부모가 함께 가야하고 지켜보는 가운데 아이들이 안전하게 놀수 있는 놀이터가 되어있다.
나에게 어릴적 놀이가 없었더라면 몸으로 뛰놀았던 그 놀이가 없었더라면 이 모든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놀이를 잊은채, 놀이를 가볍게 여긴채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기 위해 조바심으로 아이를 키우고 있었을 것이다.
2018년 플스를 만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놀이의 허용치를 알게되었다. 나에겐 큰 선물과 같은 것이였다. 안전이라는 이유로 나의 허용치는 정해져 있었다. 그 이상은 아이에게 안된다고 말하며 아이의 경험을 제한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의 선택을 존중한다고 하면서 결국의 최종의 선택은 엄마인 나의 경험치 안에서 선택을 허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그 안에는 불안이라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된것이 참 감사하다.
작년 2020년 플레이스타터의 자리해서 조금더 확장된 활동들을 하게되었다.
경기도 놀이사업을 통해 아이들을 만났고 플스 영유아 분과 꾸러미 보급사업으로 예비 부모와 현재 아이를 키우고 있는 부모들을 만났다.
타지역에서 만났던 놀이는 시흥에서 느끼던 놀이와 온도차가 컸었다. 사업의 수단으로 읽혀지는 놀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가장 마음 아팠다. 순수하고 청정의 놀이가 어른들의 개입으로 특별한 의미가 만들어지고 어른들의 시선으로 상품화시키는 느낌이랄까?
생각을 모으기 위해 더욱 치열한 토론이 필요했고 합의점을 찾기 위해 무던히도 애썻지만 짧은 시간 놀이의 진정한 가치를 공유한다는 것이 부족했기에 아쉬움이 남는다.
활동을 하면서 놀이 활동가로써의 무게감 또한 무거웠다. 매주 만나는 아이들에게 마음으로는 놀이의 선택을 존중해 주고 싶고 제한이 아닌 무한한 허용안에서 놀이를 펼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많게는 17명의 아이들의 의견들과 기관의 제한들 안에서 혼란들이 발생하고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놀이와 현실에서의 놀이 차가 생겼을 때 부딪치는 내 능력의 한계치를 느끼는 힘듬이 나를 괴롭혔다. 그럼에도 놀이의 시간을 기다리고 반갑게 맞이해주는 아이들의 말들과 그럼에도 신나게 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힘을 냈던 것 같다.
놀이활동을 하면서 가장 많이 느꼈던 것은 어른들의 놀이 인식의 개선이 가장 중요함을 느꼈다. 아이들은 시간과 친구들만 있다면 어떻게든 놀이가 되고 즐거워 한다.
결국의 어른이라는 이유로 보호라는 이유로 제한하는 모습이 아이들의 놀이를 방해하는 것을 볼수 있었다. 다칠까봐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고, 같은 건물에 다른 사람들이 시끄러워 하기에 조용히 놀아야 하고 한참 놀고 있어 더워하는 아이에게 추우니 옷입으라고 소리지르는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이 든다. 이런 분위기안에서 노는 아이들 또한 자유가 제한되어 놀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경직된 모습이 보이고 서로 영역을 제한하며 날카롭게 놀이를 이어가는 모습을 볼수 있었고 반면에 허용된 분위기에서 지내는 아이들은 자유롭고 다양한 모습으로 노는 것을 비교하며 볼수 있었다.
앞서 이런 경험들 때문일까? 요즘 나의 고민도 개입이라는 주제이다. 최소한의 개입이 아이들이 가장 행복하게 할수 있는 놀이 공간이라는 생각을 하기에 놀이활동가의 역할로서의 나를 고민하게 된다. 어른들의 역할은 사소하게 생각했던 놀이가 아이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산소와 같은 존재이고 밥과 같은 존재임을 인식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 같다.
어른이 만들어가는 놀이가 아닌 아이들이 만들어갈 수 있는 다양한 놀이가 되기 위해 자리를 아이들에게 내어주어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자연이 온갖 생물들이 살아나는 것처럼 어떠한 개입도 없이 말이다.
<클라그래> #1. -무-
어느 성에 마음씨 고운 왕비는 공주를 낳았어. 태어난 공주가 얼마나 어여쁘고 사랑스러운지 모두들 공주의 탄생을 축하해줬어.
왕과 왕비는 호기심 많고 용기 있는 공주로 자라길 바라는 마음에 클라그래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어.
어느날 왕과 왕비는 눈에 넣어도 안아플 공주를 두고 먼 길을 떠나야했어.
공주와 함께 가고 싶었지만 어린 공주에겐 너무나 위험한 여정였기에 가장 실력이 좋은 유모에게 공주를 맡기고 다녀오기로 했지.
유모는 공주님을 잘 지키겠노라 약속을 했지.
클라그래 공주님은 유모와함께 지내게 되었어.
어느날 화창한 날 길에 피는 예쁜 들꽃들이 아주 아주 이쁘게 피어 있었지. 클라그래 공주는 만져보고 싶어 꽃을 향해 손을 내밀자 어디선가 유모가 달려와 그러면 손이 지저분해진다며 공주님 손을 붙잡고 성안으로 데려가는거야.
그래서 공주는 들에 핀꽃은 지저분한거구나라고 생각하게 됐지.
또 어느 겨울이였어.
하늘에서 눈이 내리는 거야. 클라그래 공주는 처음 본 눈이 너무나 이쁘고 신기해한땅위에 쌓인 눈을 한참을 바라보며 눈을 맞고 있었지. 따뜻한 솜털처럼 생긴 눈을 만지면 금새 사라지는 그 느낌이 너무 좋았어.
그런데 어디선가 유모가 달려와 그러면 감기걸린다고 당장 들어가자며 성안으로 데려가는거야.
그래서 공주는 눈은 아픈거구나 생각했데.
공주는 성밖이 궁금해졌어. 그래서 유모에게 성밖으로 나가 보고 싶다고 졸라댔지? 아니나 다를까 유모는 성밖은 위험하다며 말도 못꺼내게 하는거야.
이렇게 클라그래 공주님은 유모의 도움만을 받고 자라났어.
시간이 지나 먼길을 떠난 왕과 왕비가 돌아왔어.
왕과 왕비는 어느누구보다도 공주가 보고 싶었어. 그래서 도착하자 마자 공주를 찾았지. 클라그래~~
유모는 왕과 왕비의 포상을 기대했지.
공주를 본 왕과 왕비는 놀라 그 어떤말도 할수가 없었어.
얼굴은 클라그래공주인거 같은데 웃지도 울지도 않는 무표정한 공주는 차갑게만 느껴졌지.
유모를 불러와 호통을 치며 성밖으로 내쫓았데
왕과 왕비는 무표정한 공주를 바라보며 지난 시간을 반성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자 무표정한 공주의 눈에도 눈물이 흐르더래.
마트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바닥에 쌓인 눈을 보며 아이들이 말한다.
“엄마, 모래놀잇감 챙겨서 나와서 놀아요.”
핸드폰을 보니, 시간은 5시 30분. 평소라면 저녁 준비를 해야할 시간이다.
갑자기 ‘놀이밥’ 책에서 읽은 구절이 생각났다.
‘아이들이 놀자고 할 때에는, 만사를 제쳐두고 함께 놀아야 한다.’
“그래. 대신 빨리 준비하고 나와야 해.”
평상시에는 준비만 1시간이 걸리는 아이들인데, 진짜 휘리릭 준비를 한다.
장갑과 모자를 쓰고 뒤돌아보니, 늦장부리기 대장 둘째가 모래놀잇감을 한 손에 들고 기다리고 있다.
1층에 도착하자마자 “와~!” 소리와 함께 집 앞 놀이터를 향해 뛰어가는 아이들.
아이들은 모래놀잇감으로 눈을 퍼 담느라 정신이 없다. 바닥에 쌓인 눈을 통 안에 퍼서 담고, 손으로 쓸어보고, 발로 밟아 보고, 눈 미끄럼을 타보고...2월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눈을 마냥 즐기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놀이밥을 선택한 나 스스로에게 흐뭇한 마음이 든다.
‘역시 밥 중에 밥은 놀이밥이지!’
“어떤 아이스크림 드실 거에요?”
“초코렛을 뿌려 놓은 거에요.”
아이들은 눈으로 자신들이 제일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만들고 있다. 하얀 눈에 고명처럼 나름 정성스럽게올려놓은 모래알갱이들...
‘어떻게 모래를 초코렛으로 생각했지?’
아이의 깜찍한 아이디어에 미소가 살며시 떠진다.
그러나 그 마음도 잠시뿐 ... 아이들이 노는 것을 마냥 서서 지켜보는 나에게는 영하 10도의 바람이 너무 차다. 핸드폰 시간을 확인하는 간격이 점점 짧아지더니 참지 못하고 나오는 현실 엄마의 잔소리.
“아 추워! 얘들아 이제 들어가자. 이제는 밥 먹어야지.”
고개를 들어 쳐다보지도 않고, 눈놀이 무아지경에 빠진 아이들.
“그럼 엄마만 들어간다...더 놀고 들어와.”라는 협박성 말을 하고 아파트 현관으로 향하는 나.
아이들이 내 뒤를 따라오나 슬그머니 들키지 않게 돌아본다.
1, 2, 3...
“엄마~! 같이 가!”를 외치며 따라오는 아이들.
그런 모습을 보며 아직도 엄마인 나를 찾는 아이들에게 감사한 순간.
오늘도 나는 놀이밥과 진짜 밥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현실 엄마였다.
앞으로도 이 줄타기는 계속 될 것 같다.
“얘들아, 내일은 뭐하고 놀래? 그래도 밥시간은 지켜 먹자...”
<나에게 놀이란?> -무-
-어릴적 함께한 놀이
-내아이가 함께하는 놀이.
-지역사회아이들이 함께하는 놀이.
나의 어린시절은 놀이와 뗄레야 뗄수가 없는 삶이였다.
밥먹고 나면 집앞 놀이터로 뛰어 나가 놀고 학교같다오면 책가방을 던져놓고 나가노는것이 일상이였다.
뒹구는 나무 막대기가 못생긴 돌맹이도, 지천에 널려 있던 흙들이 무엇이든 놀이감이 되었고 동네 빨래터가, 오질개(오디)가 열리는 앞산이, 묘가 있어 잔디가 깔려 있는 뒷도 어디든 나의 놀이터가 되었다.
특별하다고 여기지 않았기에 잊혀져 있던 놀이가 아이가 태어나고 아이가 자라다 보니 잊혀있던 놀이가 다시 생각이 난다. 그 때의 기억들이 다시 생각이 난다.
건강한 몸을 만들게 했고, 나의 생각을 만들어 주던 놀이가 더 특별하고 더 소중하게 다가오기에 내 아이에게 놀이는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릴적과는 다르게 지금의 놀이는 특별한거가 되어버렸다. 놀이의 시간은 하루 많은 일과 중에서 시간을 허락해주어야만 주어지는 시간이 되어 버렸다.
특별한 장난감 없어도 놀수 있던 놀이가 돈을 주고 산 장난감이 있어야만 놀수 있는 놀이가 되어 버렸다. 친구가 있어야만 놀수 있었던 놀이가 친구가 없어도 놀수 있는 놀이가 대부분이 되어 버렸다.
아이만의 공간인 놀이터가 부모가 함께 가야하고 지켜보는 가운데 아이들이 안전하게 놀수 있는 놀이터가 되어있다.
나에게 어릴적 놀이가 없었더라면 몸으로 뛰놀았던 그 놀이가 없었더라면 이 모든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놀이를 잊은채, 놀이를 가볍게 여긴채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기 위해 조바심으로 아이를 키우고 있었을 것이다.
2018년 플스를 만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놀이의 허용치를 알게되었다. 나에겐 큰 선물과 같은 것이였다. 안전이라는 이유로 나의 허용치는 정해져 있었다. 그 이상은 아이에게 안된다고 말하며 아이의 경험을 제한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의 선택을 존중한다고 하면서 결국의 최종의 선택은 엄마인 나의 경험치 안에서 선택을 허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그 안에는 불안이라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된것이 참 감사하다.
작년 2020년 플레이스타터의 자리해서 조금더 확장된 활동들을 하게되었다.
경기도 놀이사업을 통해 아이들을 만났고 플스 영유아 분과 꾸러미 보급사업으로 예비 부모와 현재 아이를 키우고 있는 부모들을 만났다.
타지역에서 만났던 놀이는 시흥에서 느끼던 놀이와 온도차가 컸었다. 사업의 수단으로 읽혀지는 놀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가장 마음 아팠다. 순수하고 청정의 놀이가 어른들의 개입으로 특별한 의미가 만들어지고 어른들의 시선으로 상품화시키는 느낌이랄까?
생각을 모으기 위해 더욱 치열한 토론이 필요했고 합의점을 찾기 위해 무던히도 애썻지만 짧은 시간 놀이의 진정한 가치를 공유한다는 것이 부족했기에 아쉬움이 남는다.
활동을 하면서 놀이 활동가로써의 무게감 또한 무거웠다. 매주 만나는 아이들에게 마음으로는 놀이의 선택을 존중해 주고 싶고 제한이 아닌 무한한 허용안에서 놀이를 펼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많게는 17명의 아이들의 의견들과 기관의 제한들 안에서 혼란들이 발생하고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놀이와 현실에서의 놀이 차가 생겼을 때 부딪치는 내 능력의 한계치를 느끼는 힘듬이 나를 괴롭혔다. 그럼에도 놀이의 시간을 기다리고 반갑게 맞이해주는 아이들의 말들과 그럼에도 신나게 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힘을 냈던 것 같다.
놀이활동을 하면서 가장 많이 느꼈던 것은 어른들의 놀이 인식의 개선이 가장 중요함을 느꼈다. 아이들은 시간과 친구들만 있다면 어떻게든 놀이가 되고 즐거워 한다.
결국의 어른이라는 이유로 보호라는 이유로 제한하는 모습이 아이들의 놀이를 방해하는 것을 볼수 있었다. 다칠까봐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고, 같은 건물에 다른 사람들이 시끄러워 하기에 조용히 놀아야 하고 한참 놀고 있어 더워하는 아이에게 추우니 옷입으라고 소리지르는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이 든다. 이런 분위기안에서 노는 아이들 또한 자유가 제한되어 놀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경직된 모습이 보이고 서로 영역을 제한하며 날카롭게 놀이를 이어가는 모습을 볼수 있었고 반면에 허용된 분위기에서 지내는 아이들은 자유롭고 다양한 모습으로 노는 것을 비교하며 볼수 있었다.
앞서 이런 경험들 때문일까? 요즘 나의 고민도 개입이라는 주제이다. 최소한의 개입이 아이들이 가장 행복하게 할수 있는 놀이 공간이라는 생각을 하기에 놀이활동가의 역할로서의 나를 고민하게 된다. 어른들의 역할은 사소하게 생각했던 놀이가 아이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산소와 같은 존재이고 밥과 같은 존재임을 인식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 같다.
어른이 만들어가는 놀이가 아닌 아이들이 만들어갈 수 있는 다양한 놀이가 되기 위해 자리를 아이들에게 내어주어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자연이 온갖 생물들이 살아나는 것처럼 어떠한 개입도 없이 말이다.
<2020년 겨울이 준 선물> - 무-
무겁기만했던 2020년.
첫눈이 내린단다.
그냥 눈이겠지.
띠링~ 애들아 눈이와~라는 담임선생님의 문자.
하던일을 멈추고 창밖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