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자리에 앉아 계신 분과 우연히 이야기를 나누며 들어보니 시니어 선생님으로 활동하시는 어르신들 이었다.
옆자리 계신 어르신께서 하시는 말씀이다. 나이들면 아이같이 되고, 누구와 얘기하면 기분이 좋다고 하시면서 자녀들이 걱정 할까봐 아파도 참는다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앞으로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가게 될 길을 볼 수 있었다. 난 어르신께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건강하시니까 이렇게 다니시는 거아니냐고 아프시지 말고 건강하세요!" 인사로 헤어졌다.
오늘은 어르신들과 놀이 활동하는 날이다.
경로당에서 어르신들과 놀이를하던 중 멋진 글이 눈에 들어온다.
*건강하고 젊어지는 경로당*
아~~~~ 역시, 그래서 열정적으로 열심히 하시는구나
작고 아담한 곳이지만 정이 넘치는 곳 건강하고 젊어지는 겸로당 이구나
즐겁게 웃음 꽃을 피우시면서 함께 하시는 그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그 곳에 계신 어르신, 또 다른 곳에 계신 많은 어르신들의 삶의 한부분을 행복과 즐거움을 채워 가시도록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 우리 플레이스타트들이 해야할 숙제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지내실수 있게 도움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명절이면 마음이 무겁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두 분이 함께 계셔서 그나마 마음이 덜 무거웠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명절이면 늘 혼자 보내신다. 그런데 코로나19란 바이러스 때문에 공식적으로 시댁에 가지 않아도 되는 일이 생기게 되어 나는 딸과 함께 엄마와 추억 만들기를 하러 나의 어린 시절을 보낸 친정집으로 갔다. 딸과 함께 엄마 집에 가서 명절 음식인 부침개, 갈비, 나물 등 여러 가지 음식을 하였다. 매번 명절이면 엄마가 명절동안 드실 음식을 해다 드리고 바로 시댁으로 가는데 가지 않고 집에 있으니, ‘엄마가 살다보니 이런 날도 있네’ 하고 말씀하시며 좋아했다. 나는 딸과 함께 이번 명절에 엄마와 하고 싶을 것을 생각하고 갔다. 첫날은 그냥 저와 딸이 있는 것이 좋았는데, 가족들이 보고 싶은지 힘들다고 하며 자꾸 방에 들어가 누우신다. 밖에 나사서 바람 쐬고 오자고 해도 힘들다며 싫다고 한다. 그러다 동생과 전화 통화를 하는데 요양원에 계시는 외삼촌에게 면회간다고 하였다, 그나마 외삼촌이 계시는 요양원은 한가족당 10분씩 창문을 사이에 두고 면회를 해주는데 면회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아 바로 요양원으로 출발해야 만날 수 있었다. 엄마에게 외삼촌 면회를 하는데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으니 가고 싶으면 빨리 준비하라고 말씀드렸더니 그렇게 움직이지 않으려고 하신 분이 5분 만에 챙기고 나오시며 빨리 가자고 하였다. 엄마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가족과 만나는 것이 저렇게 좋을까? 좀 늦어 겨우 창문 너머로 잠깐 볼 수 있었지만 그것이 계기가 되어 엄마랑 저수지로 바람 쐬러 가게 되었고, 찻집에 가서 차도 마시고 젊은 애들이 많이 가는 퓨전 음식점에 가서 음식도 먹고 코스모스 꽃밭에 가서 사진도 찍도, 엄마 집 청소도 허였다. 또, 외국에 있는 손주에게 영상 편지도 만들어 보냈다, 엄마는‘영상편지를 만든 사람은 우리 마을에 엄마 혼자밖에 없을 거야’ 하고 말하며 자랑하고 싶으신지, 본인에 핸드폰에 저장해달라고 하고 어떻게 핸드폰에서 켜는지 손녀에게 열심히 배우고 계신다. 코로나 때문에 무려 추석 연후 4일간과 엄마와 함께한 시간이 나에게 너무 좋은 시간이었다. 엄마 사랑해요~
남편은 4남 2녀 중 셋째아들이다. 위로 형 두 명이 있고 밑으로 동생이 셋있다. 따라서 나는 셋째 며느리이다. 나는 결혼하고 27년 동안 시집살이라는 것을 겪어 보지 않았다. 시어머니의 사랑과 배려를 받으며 살았다.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바라는 바가 없나? 싶을 정도로 우리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뭘 해달가거나 갖고 싶다거나 원하시는 것이 없다.
나는 안부전화를 잘 하지 않는 편이다(누구에게나 전화를 잘 하지 않는 편이다). 어머니에게도 마찬가지 인데 굳이 변명을 하자면 큰아주버니 가족과 함께 살고 계시고, 어머니가 병원에 가실 때나 어머님이 필요한 것이 있을 때는 가까이 살고 있는 딸들이 다 챙겨드리고 있는 것도 안심이 되어 전화를 잘 안하게 되는 이유도 있다. 물론 여기에 필요한 비용은 형제, 자매가 모은 공금을 사용한다. 한 번은 어머님이
“너는 전화를 너무 안한다. 어찌 살고 있는지 궁금하니까 전화 한 번씩 해라”
“네~~ 전화드릴께요” “근디 무소식이 희소식인께...... 넘 기다리지는 마셔용~^^”
“지랄한다”
분명 욕을 하시는데 눈은 웃고 계시다. 귀여워하시는 게 느껴진다.
나는 시골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다(편식이 심한 편이기도 하고). 그래서 신혼 초부터 지금까지 나는 시골에서 잘 먹지 않는다. 안 먹고 깨작거리는 며느리가 미울 만도 한데 그런 며느리를 늘 한결같이 걱정하시고 안쓰러워하신다.
잔소리나 야단치실 일이 있어도
“예쁘다 예쁘다 다 네가 잘해서 그런 거다” 긍정적인 모습을 보고 칭찬을 해주신다. 나중에 알았는데 우리 어머니는 문맹이시다. 어렸을 적에 아들만 공부시키고 딸들은 공부를 안시킨 것이 두고 두고 한이 된다고 하셨다. 어쨌든 공부는 못 배우셨어도 참 지혜로우신 분이시다.
우리 어머니는 며느리들에게 농사일을 안 시키신다. 그런데 고추 달라고 하면 커다란 봉투를 내 손에 쥐어 주시고 나를 앞장세워 고추밭으로 데리고 가서 크고 예쁜 고추를 따서 봉투에 담아 주신다. 때로는 깻잎, 때로는 호박, 상추, 어떨 때는 열무…….
“어머니 고구마 순 좀 주세요” 하면 너무 좋아하신다. 내가 고구마 순을 달라고 하면 역시 커다란 비닐봉투를 꺼내서 내 손에 들려주시고는 고구마 밭으로 데리고 가셔서 실하고 예쁜 순만 따서 내가 들고 있는 봉투에 가득 가득 담으신다. 나는 봉투만 들고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한가득 꺽은 고구마 순을 그늘에 돗자리 깔고 마주 앉아 껍질까지 다 까주신다. 며느리 농사일은 안 시키셔도 며느리에게 줄 작물을 딸 때는 항상 앞장 세우고 논으로 밭으로 데리고 다니신다. 그렇게라도 같이 있고 싶으셨던 것 같다.
지난 추석에 코로나 19로 인한 강력한 거리두기 정책으로 고향방문을 삼가라는 캠페인이 연일 방송에 나올 때 어머님이 전화하셔서
“마을에서도 오지 말라고 하니 너거도 오지 마라잉”
마음은 불편했지만 정부정책도 따르고 어머님을 비롯한 시골 어르신들의 건강도 염려되어 추석에 고향방문을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추석이 지난 후 어머님이 남편에게 전화하셔서
“그래도 다른 집 자식들은 다 왔더라”, “오지 말라 했지만 그래도 올 줄 알았다”
정말 서운해 하셨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어머님이 이렇게 자식에게 서운하다고 하신 경우가 거의 없었기에 놀랐었다. 구정에도 5인 이상 집합금지로 인해 시골을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그런데 어머님이 전화하셔서 올 거냐고 물어보시기에
“갈거에요. 어머니”
대답은 했지만 매우 걱정이 되었다. 나라에서는 하지 말라하고 어머니는 꼭 오기를 바라시고
인원을 줄이기 위해 우리 부부만 가기로 하고 시골 가기 전까지 외출은 삼가하고 조심 또 조심하면서 혹시 있을 불상사를 줄이려고 노력하였다. 되도록 접촉을 피하기 위해 새벽 4시 출발~~~ 적진으로 침투하는 특전사처럼 화장실도 제대로 못가고 조심조심 시골에 도착하니 어머님이 차 소리만 듣고 활짝 웃으시며 주차장으로 마중을 나오신다.
“아이고 고생했다”, “새벽에 오느라 고생 많았다”
내 손에 든 옷가방과 짐을 받아주신다. 저렇게 좋아하시는데...... 안 왔으면 어쩔 번했나 오는 내내 조마조마 했지만 그래도 잘 왔다는 마음이 든다.
보통 때는 대체로 어머니는 아침 드시면 마을회관으로 가셔서 거기서 마을 어르신들과 놀고 점심 드시고 저녁 무렵에 집으로 돌아오시는데 올해는 설날 이후 일주일동안 자체적으로 자가 격리를 하기로 마을에서 의견을 모았다고 하신다. 따라서 결혼한 이래 처음으로 명절 내내 어머니와 꼬박 함께 있었다. 내가 먹을 라면 끓이며 예의 상
“어머니~ 라면 드실래요?”
“그래 같이 먹어보자”(어머니는 라면을 거의 드시지 않는다).
어머니 드시기 편하도록 푹 익혀서 드리니 호로록 호로록 맛있게 드신다. 커피까지 타 드리니 고맙다하신다. 하루 종일 뒹굴뒹굴 미스터트롯 보면서 ‘나는 누가 좋더라’, ‘누구는 어떻더라’며 시시콜콜 수다를 떨었다. 그러다 허리 아프면 눕고 졸리면 자고 배짱이처럼 하루 종일 어머니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명절 내내 이렇게 어머니와 함께 있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이 또한 재미난 경험이었다. 다음날도 종일 먹고 자고 tv보면서 뒹굴고 있는데
“민수야~~ 저기 동내 한 바퀴 돌고 오자” 옆에 있는 아들도 아닌 며느리에게 산책가자 하신다. 이런 적이 없어서 조금 의아했지만 가볍게 잠바를 걸치고 마스크 쓰고 따라 나섰다. 운동 삼아 동네를 한 바퀴 돈다고 하신다. 요즘 기력이 자꾸 쇠하시니 본인이 아파서 자식들이 힘들어질까 걱정되어 스스로 운동을 하시는 것이다. 참 감사하다. 아이들이야기, 동네 누구누구네 이야기를 하면서 천천히 걷는데 어머님 발걸음이 점점 느려지더니 허리가 아프시다면 서 남의 집 대문 옆, 길에 주저앉아 가쁜 숨을 내쉬신다. 나도 어머니 옆에 앉았다. 걱정이다. 고관절과 허리 통증으로 고생이시다. 우리 시골은 남쪽이라 겨울에도 그리 춥지 않다. 따뜻한 햇볕을 쬐며 앉아 있는 것도 괜찮았다. 그렇게 20여분을 쉬고 다시 걸었다. 언덕이 나타나서 어머니를 부축해드렸다. 그러다 부축하는 게 중심이 기울어져 더 불편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어머니에게 바짝 붙어서 손을 잡았다. 그런데 어머니가 내 손을 꽉~~ 잡으신다. 어머니가 내 손을 왜 꽉 잡으셨는지는 모른다. 물어보지 않았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마음이 뭉클했다. 어머님이 나를 예뻐하신다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걸으며 쉬며 2시간여의 산책을 즐기고 집으로 돌아왔다. 갑작스레 이루어진 어머니와의 동네 한바퀴, 너무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오랫동안 어머니와 나의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 돌아올 때도 새벽에 출발하였다. 정말 조심스럽고 조마조마한 여행이었지만 그래도 참 잘 다녀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어머님은 나의 롤모델이다. 나도 나중에 시어머니가 되면 우리 어머니 같은 시어머니가 될 것이다. 어머니에게 배운 대로 나도 내 며느리의 단점보다는 장점을 보고 ‘잘한다 잘한다’ 하며 예뻐해 줄 것이다. 호호 거기에다 플레이스타터인 놀이 할머니라면…….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물론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적당한 거리 유지는 것은 필수이다.
미희님 오늘 느낌 그대로 멋진 시니어플레이스타터가 탄생하시길 응원할게요.
글쓰기도 이렇게 쭉 ~~ 다음글도 기대합니다 . ^^
아름 김미희의 글쓰기입니다.
* 어르신들과의 만남*
쌀쌀한 날씨, 정왕동에서 볼 일을 보고 버스를 타니 버스 안에 어르신들이 많았다.
옆자리에 앉아 계신 분과 우연히 이야기를 나누며 들어보니 시니어 선생님으로 활동하시는 어르신들 이었다.
옆자리 계신 어르신께서 하시는 말씀이다. 나이들면 아이같이 되고, 누구와 얘기하면 기분이 좋다고 하시면서 자녀들이 걱정 할까봐 아파도 참는다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앞으로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가게 될 길을 볼 수 있었다. 난 어르신께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건강하시니까 이렇게 다니시는 거아니냐고 아프시지 말고 건강하세요!" 인사로 헤어졌다.
오늘은 어르신들과 놀이 활동하는 날이다.
경로당에서 어르신들과 놀이를하던 중 멋진 글이 눈에 들어온다.
*건강하고 젊어지는 경로당*
아~~~~ 역시, 그래서 열정적으로 열심히 하시는구나
작고 아담한 곳이지만 정이 넘치는 곳 건강하고 젊어지는 겸로당 이구나
즐겁게 웃음 꽃을 피우시면서 함께 하시는 그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그 곳에 계신 어르신, 또 다른 곳에 계신 많은 어르신들의 삶의 한부분을 행복과 즐거움을 채워 가시도록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 우리 플레이스타트들이 해야할 숙제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지내실수 있게 도움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보라가지 최명신의 글쓰기입니다
<코로나19가 나에게 준 선물>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명절이면 마음이 무겁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두 분이 함께 계셔서 그나마 마음이 덜 무거웠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명절이면 늘 혼자 보내신다. 그런데 코로나19란 바이러스 때문에 공식적으로 시댁에 가지 않아도 되는 일이 생기게 되어 나는 딸과 함께 엄마와 추억 만들기를 하러 나의 어린 시절을 보낸 친정집으로 갔다. 딸과 함께 엄마 집에 가서 명절 음식인 부침개, 갈비, 나물 등 여러 가지 음식을 하였다. 매번 명절이면 엄마가 명절동안 드실 음식을 해다 드리고 바로 시댁으로 가는데 가지 않고 집에 있으니, ‘엄마가 살다보니 이런 날도 있네’ 하고 말씀하시며 좋아했다. 나는 딸과 함께 이번 명절에 엄마와 하고 싶을 것을 생각하고 갔다. 첫날은 그냥 저와 딸이 있는 것이 좋았는데, 가족들이 보고 싶은지 힘들다고 하며 자꾸 방에 들어가 누우신다. 밖에 나사서 바람 쐬고 오자고 해도 힘들다며 싫다고 한다. 그러다 동생과 전화 통화를 하는데 요양원에 계시는 외삼촌에게 면회간다고 하였다, 그나마 외삼촌이 계시는 요양원은 한가족당 10분씩 창문을 사이에 두고 면회를 해주는데 면회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아 바로 요양원으로 출발해야 만날 수 있었다. 엄마에게 외삼촌 면회를 하는데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으니 가고 싶으면 빨리 준비하라고 말씀드렸더니 그렇게 움직이지 않으려고 하신 분이 5분 만에 챙기고 나오시며 빨리 가자고 하였다. 엄마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가족과 만나는 것이 저렇게 좋을까? 좀 늦어 겨우 창문 너머로 잠깐 볼 수 있었지만 그것이 계기가 되어 엄마랑 저수지로 바람 쐬러 가게 되었고, 찻집에 가서 차도 마시고 젊은 애들이 많이 가는 퓨전 음식점에 가서 음식도 먹고 코스모스 꽃밭에 가서 사진도 찍도, 엄마 집 청소도 허였다. 또, 외국에 있는 손주에게 영상 편지도 만들어 보냈다, 엄마는‘영상편지를 만든 사람은 우리 마을에 엄마 혼자밖에 없을 거야’ 하고 말하며 자랑하고 싶으신지, 본인에 핸드폰에 저장해달라고 하고 어떻게 핸드폰에서 켜는지 손녀에게 열심히 배우고 계신다. 코로나 때문에 무려 추석 연후 4일간과 엄마와 함께한 시간이 나에게 너무 좋은 시간이었다. 엄마 사랑해요~
신 여사의 playful life : 끝없는 내리 사랑
5기 라이언 김민정
남편은 4남 2녀 중 셋째아들이다. 위로 형 두 명이 있고 밑으로 동생이 셋있다. 따라서 나는 셋째 며느리이다. 나는 결혼하고 27년 동안 시집살이라는 것을 겪어 보지 않았다. 시어머니의 사랑과 배려를 받으며 살았다.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바라는 바가 없나? 싶을 정도로 우리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뭘 해달가거나 갖고 싶다거나 원하시는 것이 없다.
나는 안부전화를 잘 하지 않는 편이다(누구에게나 전화를 잘 하지 않는 편이다). 어머니에게도 마찬가지 인데 굳이 변명을 하자면 큰아주버니 가족과 함께 살고 계시고, 어머니가 병원에 가실 때나 어머님이 필요한 것이 있을 때는 가까이 살고 있는 딸들이 다 챙겨드리고 있는 것도 안심이 되어 전화를 잘 안하게 되는 이유도 있다. 물론 여기에 필요한 비용은 형제, 자매가 모은 공금을 사용한다. 한 번은 어머님이
“너는 전화를 너무 안한다. 어찌 살고 있는지 궁금하니까 전화 한 번씩 해라”
“네~~ 전화드릴께요” “근디 무소식이 희소식인께...... 넘 기다리지는 마셔용~^^”
“지랄한다”
분명 욕을 하시는데 눈은 웃고 계시다. 귀여워하시는 게 느껴진다.
나는 시골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다(편식이 심한 편이기도 하고). 그래서 신혼 초부터 지금까지 나는 시골에서 잘 먹지 않는다. 안 먹고 깨작거리는 며느리가 미울 만도 한데 그런 며느리를 늘 한결같이 걱정하시고 안쓰러워하신다.
잔소리나 야단치실 일이 있어도
“예쁘다 예쁘다 다 네가 잘해서 그런 거다” 긍정적인 모습을 보고 칭찬을 해주신다. 나중에 알았는데 우리 어머니는 문맹이시다. 어렸을 적에 아들만 공부시키고 딸들은 공부를 안시킨 것이 두고 두고 한이 된다고 하셨다. 어쨌든 공부는 못 배우셨어도 참 지혜로우신 분이시다.
우리 어머니는 며느리들에게 농사일을 안 시키신다. 그런데 고추 달라고 하면 커다란 봉투를 내 손에 쥐어 주시고 나를 앞장세워 고추밭으로 데리고 가서 크고 예쁜 고추를 따서 봉투에 담아 주신다. 때로는 깻잎, 때로는 호박, 상추, 어떨 때는 열무…….
“어머니 고구마 순 좀 주세요” 하면 너무 좋아하신다. 내가 고구마 순을 달라고 하면 역시 커다란 비닐봉투를 꺼내서 내 손에 들려주시고는 고구마 밭으로 데리고 가셔서 실하고 예쁜 순만 따서 내가 들고 있는 봉투에 가득 가득 담으신다. 나는 봉투만 들고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한가득 꺽은 고구마 순을 그늘에 돗자리 깔고 마주 앉아 껍질까지 다 까주신다. 며느리 농사일은 안 시키셔도 며느리에게 줄 작물을 딸 때는 항상 앞장 세우고 논으로 밭으로 데리고 다니신다. 그렇게라도 같이 있고 싶으셨던 것 같다.
지난 추석에 코로나 19로 인한 강력한 거리두기 정책으로 고향방문을 삼가라는 캠페인이 연일 방송에 나올 때 어머님이 전화하셔서
“마을에서도 오지 말라고 하니 너거도 오지 마라잉”
마음은 불편했지만 정부정책도 따르고 어머님을 비롯한 시골 어르신들의 건강도 염려되어 추석에 고향방문을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추석이 지난 후 어머님이 남편에게 전화하셔서
“그래도 다른 집 자식들은 다 왔더라”, “오지 말라 했지만 그래도 올 줄 알았다”
정말 서운해 하셨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어머님이 이렇게 자식에게 서운하다고 하신 경우가 거의 없었기에 놀랐었다. 구정에도 5인 이상 집합금지로 인해 시골을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그런데 어머님이 전화하셔서 올 거냐고 물어보시기에
“갈거에요. 어머니”
대답은 했지만 매우 걱정이 되었다. 나라에서는 하지 말라하고 어머니는 꼭 오기를 바라시고
인원을 줄이기 위해 우리 부부만 가기로 하고 시골 가기 전까지 외출은 삼가하고 조심 또 조심하면서 혹시 있을 불상사를 줄이려고 노력하였다. 되도록 접촉을 피하기 위해 새벽 4시 출발~~~ 적진으로 침투하는 특전사처럼 화장실도 제대로 못가고 조심조심 시골에 도착하니 어머님이 차 소리만 듣고 활짝 웃으시며 주차장으로 마중을 나오신다.
“아이고 고생했다”, “새벽에 오느라 고생 많았다”
내 손에 든 옷가방과 짐을 받아주신다. 저렇게 좋아하시는데...... 안 왔으면 어쩔 번했나 오는 내내 조마조마 했지만 그래도 잘 왔다는 마음이 든다.
보통 때는 대체로 어머니는 아침 드시면 마을회관으로 가셔서 거기서 마을 어르신들과 놀고 점심 드시고 저녁 무렵에 집으로 돌아오시는데 올해는 설날 이후 일주일동안 자체적으로 자가 격리를 하기로 마을에서 의견을 모았다고 하신다. 따라서 결혼한 이래 처음으로 명절 내내 어머니와 꼬박 함께 있었다. 내가 먹을 라면 끓이며 예의 상
“어머니~ 라면 드실래요?”
“그래 같이 먹어보자”(어머니는 라면을 거의 드시지 않는다).
어머니 드시기 편하도록 푹 익혀서 드리니 호로록 호로록 맛있게 드신다. 커피까지 타 드리니 고맙다하신다. 하루 종일 뒹굴뒹굴 미스터트롯 보면서 ‘나는 누가 좋더라’, ‘누구는 어떻더라’며 시시콜콜 수다를 떨었다. 그러다 허리 아프면 눕고 졸리면 자고 배짱이처럼 하루 종일 어머니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명절 내내 이렇게 어머니와 함께 있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이 또한 재미난 경험이었다. 다음날도 종일 먹고 자고 tv보면서 뒹굴고 있는데
“민수야~~ 저기 동내 한 바퀴 돌고 오자” 옆에 있는 아들도 아닌 며느리에게 산책가자 하신다. 이런 적이 없어서 조금 의아했지만 가볍게 잠바를 걸치고 마스크 쓰고 따라 나섰다. 운동 삼아 동네를 한 바퀴 돈다고 하신다. 요즘 기력이 자꾸 쇠하시니 본인이 아파서 자식들이 힘들어질까 걱정되어 스스로 운동을 하시는 것이다. 참 감사하다. 아이들이야기, 동네 누구누구네 이야기를 하면서 천천히 걷는데 어머님 발걸음이 점점 느려지더니 허리가 아프시다면 서 남의 집 대문 옆, 길에 주저앉아 가쁜 숨을 내쉬신다. 나도 어머니 옆에 앉았다. 걱정이다. 고관절과 허리 통증으로 고생이시다. 우리 시골은 남쪽이라 겨울에도 그리 춥지 않다. 따뜻한 햇볕을 쬐며 앉아 있는 것도 괜찮았다. 그렇게 20여분을 쉬고 다시 걸었다. 언덕이 나타나서 어머니를 부축해드렸다. 그러다 부축하는 게 중심이 기울어져 더 불편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어머니에게 바짝 붙어서 손을 잡았다. 그런데 어머니가 내 손을 꽉~~ 잡으신다. 어머니가 내 손을 왜 꽉 잡으셨는지는 모른다. 물어보지 않았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마음이 뭉클했다. 어머님이 나를 예뻐하신다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걸으며 쉬며 2시간여의 산책을 즐기고 집으로 돌아왔다. 갑작스레 이루어진 어머니와의 동네 한바퀴, 너무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오랫동안 어머니와 나의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 돌아올 때도 새벽에 출발하였다. 정말 조심스럽고 조마조마한 여행이었지만 그래도 참 잘 다녀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어머님은 나의 롤모델이다. 나도 나중에 시어머니가 되면 우리 어머니 같은 시어머니가 될 것이다. 어머니에게 배운 대로 나도 내 며느리의 단점보다는 장점을 보고 ‘잘한다 잘한다’ 하며 예뻐해 줄 것이다. 호호 거기에다 플레이스타터인 놀이 할머니라면…….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물론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적당한 거리 유지는 것은 필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