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내가 우리 가족에게 자주 듣는 말이다. 일을 마치고 퇴근을 하는 시간에 맞춰 남편과 딸이 전화로 뭘 먹는지, 뭘 준비하는지 묻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전업주부가 아니더라도 집에서 가족의 식사를 준비하고 담당하는 것이-아직 까지는-아내, 엄마의 몫인데 우리 집은 얼마 전까지 쉐프님들의 몫이였다. 한식, 양식, 분식, 중식 등 각 쉐프님들이 준비를 해주시면 배달과 픽업으로 가져와 잘 차려 먹었다.
그리하니 마트나 장에 갈 일이 거의 없었다. 냉장고에 있는 거라곤 우유와 계란, 각종 소스가 전부였고 밥솥도 늘 전원이 꺼진 채 있었다. 오로지 전자레인지만 즉석밥을 데우거나 인스턴트 음식을 데우느라 바빴다.
그런데 코로나 펜데믹으로 내 일상이 바뀌었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가족들과 뭘 먹을지 고민도 했지만, 가족들과 뭘 할지 고민도 하면서 우린 함께 ‘요리’를 하게 되었다.
오늘은 레몬청을 만들어 본다. 마트에서 장을 보다 눈에 띄어 산 레몬으로 가족들과 뭘 할지를 정했다. 딸이 레몬청을 만드는 데 필요한 다른 재료를 찾고 남편이 집에 없는 나머지 재료를 준비해 드디어 오늘이 D-day!!!
레몬을 소금-베이킹소다-식초 순으로 깨끗이 세척을 하면서 작은 작업라인이 만들어졌다. 남편-딸-나 순으로 고무장갑을 끼고 나란히 서서 레몬을 세척하는 모습이 분업화된 작업대 같기도 하고, 체육대회에 가족 대항게임을 하는 것 같았다. ‘빨리, 빨리’, ‘뽀드득 뽀드득 소리나게’, ‘패스’를 외치며 신나게 응원하고 던지고 받으며 놀면서 하니 금새 뚝딱 다 끝났다. 남편은 용기를 열탕 소독하고 딸과 나는 레몬을 얇게 썰면서 이야기도 같이 썰어낸다. 고3이 된 딸아이는 요즘 조금 예민하지만 함께 요리할 땐 편하게 말한다. 얇게 썬 레몬을 설탕과 함께 재우면서 이야기는 이어진다. 딸아이의 이야기를 더하여 재워진 레몬청이 잘 맛 들여질 것 같다.
가족들과 함께 달고나 커피, 쿠키, 딸기타르트, 수제비, 만두 등을 주말에 함께하며 코로나 집콕 생활을 할 수 있어서 참 좋다. 코로나 펜데믹으로 불편함도 있었지만 우리 집은 바쁨으로 가려진 소중함을 찾았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적음을 더 아쉬워하는 중에 우리는 함께 모여 ‘요리‘라는 놀잇감을 찾음이 감사하다.
오늘은 뭘 먹을까? 냉장고 안에 뭐가 있는지 생각해본다. 빨, 주, 노, 초 알록달록한 채소와 다양한 재료로 뭘 할까? 오늘도 전화를 할 남편과 딸 아이의 목소리를 기다린다.
달리기만 하던 인생길에 사고로 잠간 도로공사가 있어 멈출수 밖에 없는 상황인듯 멈춤으로 비로서 내가 걷는 길옆에 풍경도 보고 바람도 들꽃도 그리고 잡초중 행운의 클로버도 찾아보는 쉬는 타임인듯 해요~모두 충분한 휴식을 취하시고 더 가벼운 걸음 으로 인생길을 걷기 바랍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아이들에게 놀이가 중요하다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놀이는 아이들만 필요하다고 생각이 들지 않는다. 놀이는 누구에게나 필요하다고 느낀다.
코로나19가 오기 전에 플레이스타터 어르신분과는 어르신들을 모시고 신체활동, 책읽기, 푸드아트 표현놀이 , 손유희, 여러가지 게임도 하면서 어르신들과의 놀이을 하였다.
그 활동을 할 때 어르신들의 표정을 보았다. 너무 행복해하셨다. 몸은 불편하시고 몸과 마음은 따로지만 열정적으로 따라 하시는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놀이는 누구에게나 필요하다고 생각을 했다.
어르신들과 함께 놀이를 할 때 어르신들의 즐거워 하시는 모습을 보면 나의 마음도 어린이가 되어 스트레스도 확 날려졌다. 빨리 코로나19가 종식이 되어서 어르신들 앞에서 재롱아닌 재롱을 부리는 시간이 오길 기다려진다.
나의 어린 시절엔 어떠한 놀이를 하면서 놀았나, 타임머신을 타고 60년대 어린시절로 가 보겠습니다.
놀이는 공기놀이,고무줄 놀이, 말뚝박기,줄넘기등등이 생각이 나네요.
그 중에 고무줄놀이를 많이 한 것 같아요. 아!!! 난 옛날 사람이다. 지금은 초등학교라 부르지만 내가 학교다닐 때는 국민학교라고 했다. 그 시절에는 공부보다 놀기를 더 좋아했던 것 같았다.
쉬는시간, 점심시간, 수업 끝나고 집에 안가고 놀던 때가 나에게도 있었다.
자! 그럼 놀아 볼까요?
엄지 손가락을 내밀면서 고무줄 놀이 할 사람 여기여기 붙어라 ~~~~
친구들과 우르르 운동장으로 뛰어 나가서 놀이를 한다. 고무줄 놀이에 맞는 노래를 부르면서 노래는 기억에 이슬비, 금강산 등을 부르면서 하고 있을 때 개구쟁이 남자 아이들이 칼을 들고와서 고무줄을 끊고 또 여자아이들 치마를 아이스케키하고 치마를 들추면서 도망을 가면 여자아이들은 '으씨', '야!!! 너희들 거기 서 잡히면 죽는다' 하면서 쫒아가서 뒤통수를 때리곤했다.
놀이란 시대를 떠나 누구에게나 시간과 장소만 허용한다면 누구에게나 필요로 한다. 또한 놀이는 누구에게나 생기를 주고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우리 집 뽐내기 대회가 있는 날이다. 우리 집은 일주일에 한 번 저녁밥을 먹고 난 후 거실에 온 가족(외할머니, 아빠, 엄마, 나, 여동생, 남동생)이 모여 아빠가 준비해주신 무대에서 나와 동생이 장기자랑을 하며 ‘우리 집 뽐내기 왕’을 겨룬다. 1등, 2등, 3등과 상품이 있는 대회가 시작이 된다.
뽐낼 장기자랑이 잘 준비되거나 새로운 장기자랑 아이템을 얻을 땐 대회가 빨리 시작되길 기다리는 마음이 조바심 난다. 뽐낼 장기자랑 거리가 없고 준비도 안되면 대회에 나가기가 참 싫다. 그렇지만 늘 응원해주고 웃어주시며 ‘최고다 ’ 해주시는 외할머니, 아빠, 엄마 모습이 좋아서 하게 된다. 하고 나면 신기하게 즐겁고 신이 난다.
오늘은 이 날을 기다리며 일주일 동안 준비한 노래와 율동을 뽐냈다. 역시 아빠는 ‘민경이 최고!’를 크게 외쳐주신다. 엄마는 힘껏 박수쳐 주시고 사진도 찍어주셨다. 외할머니와 동생들은 박수를 치고 나를 따라 춤을 추기도 했다. 기분이 진짜 좋았다.
무대에서 인사를 하고 내려오니 오늘도 아빠는 볼뽀뽀를 해주시고 외할머니는 따뜻하게 안아주셨다. 동생들의 뽐내기 장기자랑을 모두 마치고 엄마가 준비하신 간식을 모두 맛있게 먹었다.
어린 시절 추억으로 저장된 놀이기억 하나를 꺼내본다.
언제부터 우리 집 놀이문화가 되었는지 그 시작은 모르겠지만 초등학교 5학년(12살)까지 매 주 저녁밥을 먹고 난 후 열렸던 ‘우리 집 뽐내기 왕’ 대회가 있었다. 주로 나와 여동생, 남동생 셋이 장기자랑을 뽐냈지만 가끔 아빠도 출연하시고-우스꽝스런 광대 얼굴과 동물 모사를 주로 하셨다-외할머니께서 흘러간 옛노래를 불러주시기도 했다. 엄마의 장기자랑은 대회가 끝나고 모두 둘러앉아 먹는 간식이거나 우리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다.
부모님은 사업을 하셨는데 365일 밤 1시에 일을 시작해서 아침 10시가 되어 집으로 오셨다. 집에 오시면 부모님은 주무셨고 외할머니께서 나와 동생들을 돌봐주셨다. 점심이 한참 지나면 부모님이 일어나셨고 늦은 점심을 드시는 부모님 곁에서 나와 동생들은 한 숟가락씩 받아먹는 맛에 입을 서로 벌리고 자리싸움을 하곤 했다. 외할머니께서 준비해주시겠다는 밥상도 마다하고 늘 부모님의 늦은 점심을 빼앗아 나눠 먹었다.
식사를 마치시고 아빠는 거래처로 수금(받을 돈을 거두어들임)을 하러 가셨고 돌아오실 땐 늘 간식이나 선물을 사 오셨다. 아빠의 손에 들려진 봉지가 더 커진 날은 어김없이 뽐내기 대회가 있는 날이었다. 그런 날은 수금이 잘 되었거나 일찍 끝난 날이다.
무대는 아빠 담당이었다. 이불을 몇 채 겹쳐 폭신한 매트처럼 만드셨는데 나중엔 나무를 톱질하고 망치질해서 만드셨다. 1등, 2등, 3등 봉-미스코리아 진, 선, 미 같은-도 만드셨다.
봉은 계속 반납과 수여를 반복했다 ㅋㅋ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갑자기 엄마가 아프셨다. 그래도 대회는 계속 되었는데 엄마가 더 아파지셔서 아빠는 무대를 꺼내지 않았다. 무대와 봉은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밤낮이 바뀐 일상을 살아가시는 부모님이 최선을 다해 ‘놀이’를 통해 사랑과 응원을 듬뿍 먹여주신 기억이 있어 지금의 내가 있는 것 같다. 놀이의 기억을 통해 나를 만나고 이제는 나이 드신 부모님을 다시 바라보게 된다.
따스한 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는 겨울의 끝자락, 강추위가 계속 되었던 터라 오랜만에 만나는 햇살이 무척 반갑다. 냉기 때문에 오래 들여다 볼 엄두가 나질 않았던 베란다 꽃밭에도 모처럼 온화한 기운이 맴돈다. 추워서 화초들에게 물을 주는 일을 미루고 있었는데 이젠 더 이상 게으름을 피울수 없게 되어 수도꼭지에 연결된 호수로 물을 뿌려주었다.
화초 잎사귀에 쌓였던 먼지가 씻겨 나가면서 싱그러운 초록빛 잎사귀가 눈이 부시다.
베란다에는 100여개가 넘는 잡다한 화분들이 있다.
겨울날의 시린 하늘만 보이는 하늘도 가리고 싶고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꽃들이 그리워서 하나 둘 들여 놓다 보니 지금의 꽃밭이 만들어졌다.
엄동설한에도 화사하게 꽃을 피워 올리는 제라늄과, 정열적인 빛깔의 시크라멘이 눈길을 사로 잡는다. 어느새 춘란이 꽃대를 올려놓고 긴기아난은 순백의 꽃들을 피워올리며 매력적인 향기를 맘껏 발산하고 있다. 작년 10월에 파종한 시크라멘도 옹기종기 싹을 올리며 봄을 준비하고 있다.
햇살 아래에서 오랜만에 물을 주면서 시든잎을 따주고 가지들을 전정하다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친정 어머니께서 좋아하시던 아잘레아가 꽃봉오리를 내밀고 있는 화분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지금은 함께 바라볼 수 없는 빈자리가 느껴져 가슴에 서늘한 바람이 들어온다.
꽃을 좋아하시던 친정어머님께서는 봄이 되면 꼭 아잘레아를 사다 꽃밭에 심으셨다.
마당 한켠에 그리 넓지 않은 꽃밭이었지만, 백합, 장미, 국화, 수국, 단정화, 채송화, 봉숭아등 갖가지 꽃들이 심어져 있었다. 어머니의 부지런한 손길 덕분에 집안은 항상 꽃으로 가득했고 대문에는 아치형의 새빨간 넝쿨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 오월부터 유월까지 환상적인 풍경을 만들어 냈었다.
하얀눈이 내리는 날엔 설중매의 고혹적인 향기가 눈밭을 서성거렸고. 샛노란 수선화에 감격할 즈음엔 겨우내 맨 몸둥이로 견뎌낸 가지에서는 시샘하듯 연둣빛 새싹들이 터져 나왔다.
연분홍 꽃들이 하나둘 터지는 진달래꽃을 바라보고 있으면 가슴속 어둔방에도 연분홍 등불이 하나씩 켜졌다. 수국이 피어나는 오월의 꽃밭에서는 ‘봄날은 간다’를 부르시며 수줍게 웃으시던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뜨거운 여름날을 보내고 나서 가을의 꽃밭에서 만난 국화꽃 향기는 쓸쓸함이 가득 베어 있어서 그리운 얼굴들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어머니께서는 철이 바뀔때면 시들은 꽃들을 솎아내고 새로운 꽃들을 심으시느라 늘 분주하셨다. 어떤때는 어둠이 내릴때까지 꽃밭에 계셔서 늦은 저녁을 먹은 적도 많았었다.
쉬는날이면 하루종일 베란다에서 노는것도 모자라 저녁때가 되어도 꽃밭을 손질하고 있는 내게 남편이 슬그머니 다가와 "재밌어?" 라고 묻는다,
나만의 꽃밭에서 해질 때까지 맘껏 자유로움을 느끼며, 무아지경에 빠져 일상놀이를 즐기는 순간이야 말로 최고로 행복한 시간이다.
꽃밭을 가꾸다가 혼자 맡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꽃향기를 만난 날에는 남편을 부른다.
못이긴듯 나와 지긋이 꽃향기를 맡는 남편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당 곳곳에 새로 피어난 꽃들을 가리키며 자랑스레 보여 주시던 어머니 모습이 생각난다.
겨울 날씨로는 드물게 화창한 날씨에 꽃단장을 끝냈다.
햇살 아래에서 반짝이는 화초를 보니 당분간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꽃들을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마음이 편안하다. 베란다에 마련한 나의 꽃밭을, 많은 날 정성이 깃든 어머니의 꽃밭과 비교하기에는 부족하지만, 꽃을 돌보면서 느끼게 되는 희열과 평온한 느낌은 어머니의 꽃밭에서 느끼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햇빛 좋은 날 하나씩 터지는 꽃봉오리와 새싹들의 매력에 취해서 꽃들 사이를 옮겨 다니다 보면 울적했던 마음도 눈 녹듯 사라져 버린다.
철 따라 그리움으로 피어나는 꽃과, 애잔함으로 떨어지는 꽃들이 있고 , 물만 먹고도 아름다운 꽃잎을 만들어 내는 요술 같은 이곳은, 마음속의 나와 반갑게 조우할 수 있는 소중한 곳이다.
겨울의 끝에서 꽃피는 봄날은 아직 멀었는데, 성급한 군자란은 벌써 기다란 목을 내밀어 꽃을 피우고 있다. 형형색색의 꽃봉오리를 달고 있는 카랑코에와 달콤한 향기가 매력적인 만리향이 벌써부터 봄을 안고 있어서 머지않아 베란다에는 꽃들의 향연이 펼쳐질 것이다.
100가지 대단해요 저는 잘 못키워요 저희 친정엄마께서도 죽어가던 것도 살리시는데 아이비 님도 꽃을 키우는 시는 정원사 이시네요 글을 읽으면서 베란다의 모습이 그려져요 기회가 된다면 가보고 싶에요 다는 모르지만 아는 이름의 꽃이 나오니 반갑네요 카랑코에 ,제라늄 색색별로 피면 너무 좋아요 보기만 해도 미소가 지어지는 꽃들 예뻐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갑자기 온 몸은 누가봐도 멀쩡한데 마치 바닥과 나 사이에 아주 강력한 접착제가 있는 것처럼 난 일어나지 못했다.
그 일이 일어나던 날도 지인을 돕기위해 주말을 반납하고 거마비정도도 사양하며 그저 일을 도왔다. 사람들은 내가 그 가게의 주인인 줄 알고 나때문에 온다할 정도였으니 꽤나 단골고객들을 불러모으는 재미에 더 신명나게 했더랬다. 여느때와 다름없이 토요일 열심히 불태우고 일요일이 되었다. 그리고 일어나지 못했다...
'어? 뭐지? 가위눌린건가?' 몸이 안 움직였다. 언제나 함께했던 당시의 남자친구이자 지금의 신랑이 옆에 있었다. 그래서 소리를 내보기로 했다.
"아- 아아아. 가나다라마바사" 인기척에 깬 신랑이
"왜? 왜 그래?" 물었다.
"몸이 안 움직여져.. 뭐지? 나 안 아픈데...이상해.."
그렇게 나는 약 일주일간 꼼짝없이 누워있었다.
정말 세상 신기한 경험이었다.
'와 일어나고 싶은데 일어날 수 없다니...'
그리고 어느 병원을 가도 나는 병명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결국 직장도 바꾸고 다양한 환경에 변화를 주면서 해가 흘렀다.
연례행사처럼 다양한 모습으로 찾아오는 그 친구를 맞이한다.
그리고 그 친구와 이별하면 또 용기를 내어 삶에 도전하고 쉼을 반복한다.
그리고 매일매일 에너지를 조절하며 하루하루를 관리한다.
어쩌면 세상이 나에게 알려주는 "나를 돌아보는 시간, 나에게 올인하는 시간, 나를 공식적으로 놀리게 하는 시간"이다 라고 하는 건 아닐까 한다. 물론 나말고는 측근에 경험자가 없어 좀 어려울 때도 많고, 여전히 무언가를 온 마음을 다해 맞이하고 해내려는 내가 걱정이 된다.
남편은 4남 2녀 중 셋째아들이다. 위로 형 두 명이 있고 밑으로 동생이 셋있다. 따라서 나는 셋째 며느리이다. 나는 결혼하고 27년 동안 시집살이라는 것을 겪어 보지 않았다. 시어머니의 사랑과 배려를 받으며 살았다.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바라는 바가 없나? 싶을 정도로 우리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뭘 해달가거나 갖고 싶다거나 원하시는 것이 없다.
나는 안부전화를 잘 하지 않는 편이다(누구에게나 전화를 잘 하지 않는 편이다). 어머니에게도 마찬가지 인데 굳이 변명을 하자면 큰아주버니 가족과 함께 살고 계시고, 어머니가 병원에 가실 때나 어머님이 필요한 것이 있을 때는 가까이 살고 있는 딸들이 다 챙겨드리고 있는 것도 안심이 되어 전화를 잘 안하게 되는 이유도 있다. 물론 여기에 필요한 비용은 형제, 자매가 모은 공금을 사용한다. 한 번은 어머님이
“너는 전화를 너무 안한다. 어찌 살고 있는지 궁금하니까 전화 한 번씩 해라”
“네~~ 전화드릴께요” “근디 무소식이 희소식인께...... 넘 기다리지는 마셔용~^^”
“지랄한다”
분명 욕을 하시는데 눈은 웃고 계시다. 귀여워하시는 게 느껴진다.
나는 시골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다(편식이 심한 편이기도 하고). 그래서 신혼 초부터 지금까지 나는 시골에서 잘 먹지 않는다. 안 먹고 깨작거리는 며느리가 미울 만도 한데 그런 며느리를 늘 한결같이 걱정하시고 안쓰러워하신다.
잔소리나 야단치실 일이 있어도
“예쁘다 예쁘다 다 네가 잘해서 그런 거다” 긍정적인 모습을 보고 칭찬을 해주신다. 나중에 알았는데 우리 어머니는 문맹이시다. 어렸을 적에 아들만 공부시키고 딸들은 공부를 안시킨 것이 두고 두고 한이 된다고 하셨다. 어쨌든 공부는 못 배우셨어도 참 지혜로우신 분이시다.
우리 어머니는 며느리들에게 농사일을 안 시키신다. 그런데 고추 달라고 하면 커다란 봉투를 내 손에 쥐어 주시고 나를 앞장세워 고추밭으로 데리고 가서 크고 예쁜 고추를 따서 봉투에 담아 주신다. 때로는 깻잎, 때로는 호박, 상추, 어떨 때는 열무…….
“어머니 고구마 순 좀 주세요” 하면 너무 좋아하신다. 내가 고구마 순을 달라고 하면 역시 커다란 비닐봉투를 꺼내서 내 손에 들려주시고는 고구마 밭으로 데리고 가셔서 실하고 예쁜 순만 따서 내가 들고 있는 봉투에 가득 가득 담으신다. 나는 봉투만 들고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한가득 꺽은 고구마 순을 그늘에 돗자리 깔고 마주 앉아 껍질까지 다 까주신다. 며느리 농사일은 안 시키셔도 며느리에게 줄 작물을 딸 때는 항상 앞장 세우고 논으로 밭으로 데리고 다니신다. 그렇게라도 같이 있고 싶으셨던 것 같다.
지난 추석에 코로나 19로 인한 강력한 거리두기 정책으로 고향방문을 삼가라는 캠페인이 연일 방송에 나올 때 어머님이 전화하셔서
“마을에서도 오지 말라고 하니 너거도 오지 마라잉”
마음은 불편했지만 정부정책도 따르고 어머님을 비롯한 시골 어르신들의 건강도 염려되어 추석에 고향방문을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추석이 지난 후 어머님이 남편에게 전화하셔서
“그래도 다른 집 자식들은 다 왔더라”, “오지 말라 했지만 그래도 올 줄 알았다”
정말 서운해 하셨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어머님이 이렇게 자식에게 서운하다고 하신 경우가 거의 없었기에 놀랐었다. 구정에도 5인 이상 집합금지로 인해 시골을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그런데 어머님이 전화하셔서 올 거냐고 물어보시기에
“갈거에요. 어머니”
대답은 했지만 매우 걱정이 되었다. 나라에서는 하지 말라하고 어머니는 꼭 오기를 바라시고
인원을 줄이기 위해 우리 부부만 가기로 하고 시골 가기 전까지 외출은 삼가하고 조심 또 조심하면서 혹시 있을 불상사를 줄이려고 노력하였다. 되도록 접촉을 피하기 위해 새벽 4시 출발~~~ 적진으로 침투하는 특전사처럼 화장실도 제대로 못가고 조심조심 시골에 도착하니 어머님이 차 소리만 듣고 활짝 웃으시며 주차장으로 마중을 나오신다.
“아이고 고생했다”, “새벽에 오느라 고생 많았다”
내 손에 든 옷가방과 짐을 받아주신다. 저렇게 좋아하시는데...... 안 왔으면 어쩔 번했나 오는 내내 조마조마 했지만 그래도 잘 왔다는 마음이 든다.
보통 때는 대체로 어머니는 아침 드시면 마을회관으로 가셔서 거기서 마을 어르신들과 놀고 점심 드시고 저녁 무렵에 집으로 돌아오시는데 올해는 설날 이후 일주일동안 자체적으로 자가 격리를 하기로 마을에서 의견을 모았다고 하신다. 따라서 결혼한 이래 처음으로 명절 내내 어머니와 꼬박 함께 있었다. 내가 먹을 라면 끓이며 예의 상
“어머니~ 라면 드실래요?”
“그래 같이 먹어보자”(어머니는 라면을 거의 드시지 않는다).
어머니 드시기 편하도록 푹 익혀서 드리니 호로록 호로록 맛있게 드신다. 커피까지 타 드리니 고맙다하신다. 하루 종일 뒹굴뒹굴 미스터트롯 보면서 ‘나는 누가 좋더라’, ‘누구는 어떻더라’며 시시콜콜 수다를 떨었다. 그러다 허리 아프면 눕고 졸리면 자고 배짱이처럼 하루 종일 어머니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명절 내내 이렇게 어머니와 함께 있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이 또한 재미난 경험이었다. 다음날도 종일 먹고 자고 tv보면서 뒹굴고 있는데
“민수야~~ 저기 동내 한 바퀴 돌고 오자” 옆에 있는 아들도 아닌 며느리에게 산책가자 하신다. 이런 적이 없어서 조금 의아했지만 가볍게 잠바를 걸치고 마스크 쓰고 따라 나섰다. 운동 삼아 동네를 한 바퀴 돈다고 하신다. 요즘 기력이 자꾸 쇠하시니 본인이 아파서 자식들이 힘들어질까 걱정되어 스스로 운동을 하시는 것이다. 참 감사하다. 아이들이야기, 동네 누구누구네 이야기를 하면서 천천히 걷는데 어머님 발걸음이 점점 느려지더니 허리가 아프시다면 서 남의 집 대문 옆, 길에 주저앉아 가쁜 숨을 내쉬신다. 나도 어머니 옆에 앉았다. 걱정이다. 고관절과 허리 통증으로 고생이시다. 우리 시골은 남쪽이라 겨울에도 그리 춥지 않다. 따뜻한 햇볕을 쬐며 앉아 있는 것도 괜찮았다. 그렇게 20여분을 쉬고 다시 걸었다. 언덕이 나타나서 어머니를 부축해드렸다. 그러다 부축하는 게 중심이 기울어져 더 불편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어머니에게 바짝 붙어서 손을 잡았다. 그런데 어머니가 내 손을 꽉~~ 잡으신다. 어머니가 내 손을 왜 꽉 잡으셨는지는 모른다. 물어보지 않았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마음이 뭉클했다. 어머님이 나를 예뻐하신다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걸으며 쉬며 2시간여의 산책을 즐기고 집으로 돌아왔다. 갑작스레 이루어진 어머니와의 동네 한바퀴, 너무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오랫동안 어머니와 나의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 돌아올 때도 새벽에 출발하였다. 정말 조심스럽고 조마조마한 여행이었지만 그래도 참 잘 다녀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어머님은 나의 롤모델이다. 나도 나중에 시어머니가 되면 우리 어머니 같은 시어머니가 될 것이다. 어머니에게 배운 대로 나도 내 며느리의 단점보다는 장점을 보고 ‘잘한다 잘한다’ 하며 예뻐해 줄 것이다. 호호 거기에다 플레이스타터인 놀이 할머니라면…….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물론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적당한 거리 유지는 것은 필수이다.
여름이 시작될 무렵 오후 7시 나는 한 아이를 입양하기 위해 퇴근하는 딸을 마중 나갔다. 십 여분쯤 걸었을까 저만치서 아이를 안고 행복한 표정으로 걸어오는 딸의 모습이 보였다. 예쁜 핀을 꽂고 커다랗고 또랑또랑한 눈망울을 가진 그녀를 본 순간 나는 한순간에 반해 버렸고, 낯선 사람과 만난 그녀가 놀랄까 봐 흘낏 한 번 쳐다보는 것으로 만족할 만큼 특별한 대접을 받으며 그녀는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애완용 강아지에 대한 유행이 거세게 불어도 끄덕 않고, 개는 당연히 마당에서 키우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둘째가 저녁 식사자리에서 조심스럽게 강아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사님네 지인이 기르던 애완견이 새끼를 낳았는데 현관문을 열어둔 사이 어미가 나가 버렸다는 것이다. 강아지 세 마리중에 두 마리는 입양되었고, 나머지 한 마리를 입양할 사람을 찾는데 우리가 꼭 키웠으면 좋겠다고 했다. 듣고 보니 사정은 딱했지만 확고하게 안 된다고 선언하고, 일 때문에 까마득히 잊고 지냈다.
며칠 후 딸로부터 전화가 왔다. 부모님의 성격을 알기에 기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접었는데, 데려가기로 한 선배 언니의 어머님께서 지병으로 입원을 하게 되었단다.
의 간절한 마음에 감동을 받아 허락을 했다. 사실 나도 어릴 적 강아지를 사달라고 허구한 날 노래를 불러 어머니께서 강아지를 사주셨다.
윤기 나는 까만털을 가진 진돗개였는데, 쫑긋한 귀가 매력적인 아이라 이름을 쫑이라고 지어주고 날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들로 운동장으로 뛰어다니며 함께 놀았다. 쫑은 어찌나 영리한지 온 동네 지킴이로 톡톡히 한 몫을 하면서 어른들과 아이들에게 사랑을 듬뿍 받았다. 당시에는 학교에서 쥐를 잡아 오라고 할 만큼 쥐 소탕작전을 위해 정기적으로 온 동네에 쥐약을 놓는 날이 있었고, 다음날이면 짖궂은 아이들의 손에는 어김없이 쥐가 몇 마리씩 들려 있었다.
그것도 누가 많이 잡았나 의기 양양하게 자랑까지 하면서 말이다.
우리집은 방 한칸은 세를 놓고 살았는데 셋방 새댁이 다음날이면 수거해야 하는 쥐약을 깜박하고 수거하지 않아, 쫑은 언제 그걸 먹었는지 쏜살같이 마루 밑으로 들어가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며 한참을 울부짖다가 무지개 다리를 건넜다.
찰나에 일어난 일이고 마루 밑에 있는 아이를 어떻게든 밖으로 유인해 살려 보려고 아버지께서는 온갖 애를 다 쓰셨으지만, 이미 덩치가 커질대로 크고, 워낙 거세게 반항을 하는지라 손도 못 써보고 순식간에 보낼 수밖에 없었다.
가족들은 슬픔을 억누르고 침통한 마음으로 서로 눈치만 보는데, 나는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태어 나서 이렇게 슬픈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 같았던 이별의 아픔을 그 후로도 몇 번이나 더 겪고 나서 아버지께서는 다시는 개는 키우지 않겠다고 선언하셨다.
가슴 아픈 유년의 추억을 뒤로 한 채 어른이 되면서 나의 마음도 메말라 갔던 것 같다.
애완견을 봐도 그저 심드렁하고, ‘개엄마’ 라고 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콧방귀를 뀔 정도로 관심이 없었다. 어여쁜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동글동글 작고 귀여운 얼굴에 포도알처럼 크고 동그란 눈, 갈색 머리에 멋내기 염색을 한 것처럼 턱과 다리와 배만 하얀 그녀의 모습이 볼수록 예뻐 보이기 시작했다.
태어난 지 겨우 한 달 밖에 안되어 1kg도 채 안된 아이가 엄마품을 떠난 것이 안쓰러워 딸이 모든 뒷바라지를 다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내가 직접 돌보기로 했다.
잠잘때도 옆에 두고 지켜보고, 목욕을 시킨 후에는 감기에 걸릴까 봐 30분이 넘게 드라이기로 털을 말려주고, 두 시간이 넘는 이발도 집에서 시키면서 정성으로 키웠더니 그녀는 나를 너무나 좋아한다.
온종일 엄마가 집에 있는 날이면 주방으로, 방으로, 졸졸 따라다니고, 걸레질이라도 할라치면 걸레를 물고 놀아 달라고 장난을 치기도 한다.
베란다에서 꽃을 손질하고 있는 날은 창틀에 턱을 괴고 엎드려 바라보고, 외출하려고 화장을 하고 나서면 먼발치서 애잔하게 쳐다보다 “모모야 가자” 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쪼르르 미끄럼을 타듯이 순식간에 달려와 내 품에 안긴다.
스토커처럼 따라다녀서 가끔은 매정하게 밀쳐내기도 하는데, 다시 다가와서 살며시 자고있는 것을 보면 가여운 마음이 들어 엉덩이를 두어번 토닥여 줄 수밖에 없다, 몸이 아파 누워있으면 옆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퇴근해서 돌아오면 꼬리가 떨어져나갈 정도로 환영을 한다. 엄마가 돌아올 때까지 현관문을 바라보며 꼼짝도 하지 않아 측은하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아내가 들어오는것 보다 그녀가 기다림에서 해방되는것을 더 기뻐하는 남편은 내가 그녀를 안아주고 있는 모습을 더 좋아할 만큼 어여쁜 모모씨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다.
어느해 여름 잘 자라던 아이의 건강에 이상이 왔다. 물을 벌컥벌컥 마시던 평상시와 달리 물은 전혀 입에 대지도 않고, 시름시름 늘어져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찾아온 이상 증세에 이러다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지? 덜컥 겁이 났다.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병원으로 데려갔는데 자궁축농증으로 응급수술을 해야 한단다. 혈액검사를 해보고 이상 없으면 바로 수술을 하자고 했다. 노령견이라 걱정은 되는데 검사결과만 좋으면, 수술하고 괜찮을거라고 했다. 수술까지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는데 표현도 못하고 얼마나 아팠을까 마음이 먹먹하고 미안해서 눈물이 났다.
다행히 검사결과가 좋아 무사히 수술을 마치고, 입원을 하고, 하루 이틀 경과를 지켜봐야 한다고 해서 입원시키고 나오는데, 쫑과의 이별이 슬퍼서 엉엉 울었던 것처럼,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답답한 건 못 견디는 아이인데 좁은 케이지 안에서 얼마나 답답할까. 잠은 잘 자는지 먹을 것은 먹었는지...
밤새 잠을 설치고 아침이 되어 병원으로 달려갔다. 우리 목소리가 들리는지 금새 알아차리고 나 여기 있다고 낑낑거리며 짓는다. 휴 ~ 상태가 괜찮은가 보다 싶어 안심도 되고 짓는 소리까지도 반가웠다, 간호사가 밤새 잠 못 자고 낑낑거렸다고 전해 주며 “모모야 엄마 오셨다” 라고 하자 마취가 덜 깬 비틀거리는 다리로 꼬리를 흔들며 데려가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그랬을까 마음이 아팠다. 바로 데려올 수 있을거라 기대하고 갔는데, 아직 경과도 지켜봐야 하고 링거 맞는데 항생제와 치료제가 들어 있어서 다 맞고 나서 한 번 더 맞은 다음에 저녁때나 되어야 데려갈 수 있다고 했다. 아프고 나서 더 귀함을 알게 되었고 무사히 건강을 회복하여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평화로운 일상이 찾아왔다.
그렇게 잔인한 여름을 보내고 보석 같은 눈에 이상이 생긴 건 그로부터 10년 후 녹내장이 찾아왔다. 수없이 병원을 들락거리며 치료를 받았지만, 안압이 심해지면 안구 적출까지 해야 한다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통보를 받고 아이의 예쁜 눈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토록 좋아하던 산책도 주위의 아름다운 풍경도,..
가장 슬픈 건 더 이상 우리와 눈맞춤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딸의 간절한 마음에 동화되어 입양했던 강아지였는데 이제는 두 딸들이 떠나버린 조용한 집안에서 내게 기대어 자고 있는 그녀는 아름다운 눈망울과 기막힌 순정을 가진 우리집의 보물이다,
화장실을 찾아가다 앞이 안보여 가끔씩 실수를 해서 한마디 하려고 하면 “엄마 모모는 엄마 딸이 잖아요.!” 라고 서둘러 방호벽을 쳐주는 딸의 옹호를 받으며, 그녀는 오늘도 호랑이가 먹이감을 향해 다가가듯 한 발짝씩 조심스레 집안을 오고 간다.
벌써 새벽이다. 그녀는 내가 앉아 있는 거실에서 꿈을 꾸는지 잠꼬대를 하고, 코까지 골면서 쌔근쌔근 잠을 자고 있다. 내가 일어서면 그녀는 벌떡 일어나 주위을 살필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나는 따스하게 안아주고 공감하는 것 보다는 본인 일이니 스스로 알아서 하겠지라는 다소 방관자적인 매정함을 가지고 있었다. 어려움을 함께 해결하고자 하는 마음이 한참이나 부족했는데, 지금은 그런 마음을 다독여 줄수 있는 아량을 갖게 되었다.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명절이면 마음이 무겁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두 분이 함께 계셔서 그나마 마음이 덜 무거웠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명절이면 늘 혼자 보내신다. 그런데 코로나19란 바이러스 때문에 공식적으로 시댁에 가지 않아도 되는 일이 생기게 되어 나는 딸과 함께 엄마와 추억 만들기를 하러 나의 어린 시절을 보낸 친정집으로 갔다. 딸과 함께 엄마 집에 가서 명절 음식인 부침개, 갈비, 나물 등 여러 가지 음식을 하였다. 매번 명절이면 엄마가 명절동안 드실 음식을 해다 드리고 바로 시댁으로 가는데 가지 않고 집에 있으니, ‘엄마가 살다보니 이런 날도 있네’ 하고 말씀하시며 좋아했다. 나는 딸과 함께 이번 명절에 엄마와 하고 싶을 것을 생각하고 갔다. 첫날은 그냥 저와 딸이 있는 것이 좋았는데, 가족들이 보고 싶은지 힘들다고 하며 자꾸 방에 들어가 누우신다. 밖에 나사서 바람 쐬고 오자고 해도 힘들다며 싫다고 한다. 그러다 동생과 전화 통화를 하는데 요양원에 계시는 외삼촌에게 면회간다고 하였다, 그나마 외삼촌이 계시는 요양원은 한가족당 10분씩 창문을 사이에 두고 면회를 해주는데 면회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아 바로 요양원으로 출발해야 만날 수 있었다. 엄마에게 외삼촌 면회를 하는데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으니 가고 싶으면 빨리 준비하라고 말씀드렸더니 그렇게 움직이지 않으려고 하신 분이 5분 만에 챙기고 나오시며 빨리 가자고 하였다. 엄마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가족과 만나는 것이 저렇게 좋을까? 좀 늦어 겨우 창문 너머로 잠깐 볼 수 있었지만 그것이 계기가 되어 엄마랑 저수지로 바람 쐬러 가게 되었고, 찻집에 가서 차도 마시고 젊은 애들이 많이 가는 퓨전 음식점에 가서 음식도 먹고 코스모스 꽃밭에 가서 사진도 찍도, 엄마 집 청소도 허였다. 또, 외국에 있는 손주에게 영상 편지도 만들어 보냈다, 엄마는‘영상편지를 만든 사람은 우리 마을에 엄마 혼자밖에 없을 거야’ 하고 말하며 자랑하고 싶으신지, 본인에 핸드폰에 저장해달라고 하고 어떻게 핸드폰에서 켜는지 손녀에게 열심히 배우고 계신다. 코로나 때문에 무려 추석 연후 4일간과 엄마와 함께한 시간이 나에게 너무 좋은 시간이었다. 엄마 사랑해요~
옆자리에 앉아 계신 분과 우연히 이야기를 나누며 들어보니 시니어 선생님으로 활동하시는 어르신들 이었다.
옆자리 계신 어르신께서 하시는 말씀이다. 나이들면 아이같이 되고, 누구와 얘기하면 기분이 좋다고 하시면서 자녀들이 걱정 할까봐 아파도 참는다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앞으로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가게 될 길을 볼 수 있었다. 난 어르신께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건강하시니까 이렇게 다니시는 거아니냐고 아프시지 말고 건강하세요!" 인사로 헤어졌다.
오늘은 어르신들과 놀이 활동하는 날이다.
경로당에서 어르신들과 놀이를하던 중 멋진 글이 눈에 들어온다.
*건강하고 젊어지는 경로당*
아~~~~ 역시, 그래서 열정적으로 열심히 하시는구나
작고 아담한 곳이지만 정이 넘치는 곳 건강하고 젊어지는 겸로당 이구나
즐겁게 웃음 꽃을 피우시면서 함께 하시는 그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그 곳에 계신 어르신, 또 다른 곳에 계신 많은 어르신들의 삶의 한부분을 행복과 즐거움을 채워 가시도록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 우리 플레이스타트들이 해야할 숙제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지내실수 있게 도움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앗, 여기다 쓰는 것이었군요.
----
나와 만나는 놀이_과거편
"코로나 19 이전의 놀이와 삶을 되돌아보며…"
코로나 19 이전의 삶은 “직진”의 삶이였다.
돈, 거리 등과 같은 현실적인 벽에 부딪혀 단념하거나 보류한 것들이 아니라면,
항상 나의 호기심이라는 나만의 든든한 아군을 발판삼아 마음먹은 대로 직진하며 도전하는 하루하루를 보내지 않았었나 싶다.
물론 콩알만한 간을 가지고 있어 표시도 안나는 도전이 많아 나말고는 아무도 모른다. 🤗
여튼 덕분에 많은 시행착오, 경험, 추억이 샘 솟는 나날들이었다. 10대부터 “집단지성의 힘, 연결의 힘, 나눔의 힘”을 믿어온 내가 30대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이 믿음을 확장시켜보려했다고나 할까.
달팽이도 이보다 빠르겠다 싶은 나의 곰실곰실 도전은 2019년 ‘아무놀이터, 오롯이그림책, 예숢, 벨이랑 코랑, 작가예장, 놀이대장’ 등의 다양한 소속, 형태 그리고 이름으로 세상밖으로 몇 번이나 나왔다가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지금은 조금 더 기이이이이일게 화려하게 나와볼껄하며 그렇게 아쉽다.
‘뭐라도 해볼껄…’
‘조금 더 박차고 나가볼걸…’
윤종신의 '나이'라는 노래처럼 현실이 팍팍함을 느낄때마다 다양한 삶의 이벤트를 꾸준히 만들어 왔는데... 막상 그런 것이 어려운 시기를 맞이하니, 추억할 과거를 기록으로 남겨놓지 않은 나의 여유라는 이름의 게으름이 얄밉다.
'왕년에 말이야~' 할게 1도 없다.
섬세한 호기심 퀸인 내가 세상을 놀이터 삼아 우왕좌왕 여기저기 방황하며 들쑤시고 놀기에 충분했던 코로나 이전의 삶은 이제 쿨하게 내려놓고, 반추하고, 지금의 시대를 온전히 살고자 노력하려 한다.
제일 아쉬운 건, 더 돌아다니며 놀려고 운전연수도 다시 받았는데 운전대를 다시 내려놓았다… 만년 장롱면허가 될 판이다. 망할 코로나. 나나 실컷 사랑하며 놀아야겠다. 😁
https://youtu.be/TAfITcsgheI 2011 월간 윤종신 12월호 - 나이
같이 들으실래요? ㅋ
#playfulmylife #playful my life
두개 먹는사람없고 먹지않는 사람없고 하나씩 다들 먹는데 이상하게 억울한게 나이인거같아요~~하지만 나이는 생각하기 나름..의미가 없는거 같아요..체력이 문제이긴하지만...~~^^파이팅!!
면허도 없는 저인데 장롱면허라니 아깝네요 다시 도전
세상을 놀이터 삼아 놀이를 멈추지 않는 한샘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지네요. 포스트 코로나 19 이후 새로운 놀이를 발굴해 나가야겠어요. 하하 나른한 오후 음악을 좀 들어야겠네요^^ 고맙니다.
: PLAYFUL LIFE COOKING WITH FAMILY
“여보, 오늘은 저녁이 뭐야?”
”엄마. 오늘은 우리 뭐 해요?“
요즘 내가 우리 가족에게 자주 듣는 말이다. 일을 마치고 퇴근을 하는 시간에 맞춰 남편과 딸이 전화로 뭘 먹는지, 뭘 준비하는지 묻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전업주부가 아니더라도 집에서 가족의 식사를 준비하고 담당하는 것이-아직 까지는-아내, 엄마의 몫인데 우리 집은 얼마 전까지 쉐프님들의 몫이였다. 한식, 양식, 분식, 중식 등 각 쉐프님들이 준비를 해주시면 배달과 픽업으로 가져와 잘 차려 먹었다.
그리하니 마트나 장에 갈 일이 거의 없었다. 냉장고에 있는 거라곤 우유와 계란, 각종 소스가 전부였고 밥솥도 늘 전원이 꺼진 채 있었다. 오로지 전자레인지만 즉석밥을 데우거나 인스턴트 음식을 데우느라 바빴다.
그런데 코로나 펜데믹으로 내 일상이 바뀌었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가족들과 뭘 먹을지 고민도 했지만, 가족들과 뭘 할지 고민도 하면서 우린 함께 ‘요리’를 하게 되었다.
오늘은 레몬청을 만들어 본다. 마트에서 장을 보다 눈에 띄어 산 레몬으로 가족들과 뭘 할지를 정했다. 딸이 레몬청을 만드는 데 필요한 다른 재료를 찾고 남편이 집에 없는 나머지 재료를 준비해 드디어 오늘이 D-day!!!
레몬을 소금-베이킹소다-식초 순으로 깨끗이 세척을 하면서 작은 작업라인이 만들어졌다. 남편-딸-나 순으로 고무장갑을 끼고 나란히 서서 레몬을 세척하는 모습이 분업화된 작업대 같기도 하고, 체육대회에 가족 대항게임을 하는 것 같았다. ‘빨리, 빨리’, ‘뽀드득 뽀드득 소리나게’, ‘패스’를 외치며 신나게 응원하고 던지고 받으며 놀면서 하니 금새 뚝딱 다 끝났다. 남편은 용기를 열탕 소독하고 딸과 나는 레몬을 얇게 썰면서 이야기도 같이 썰어낸다. 고3이 된 딸아이는 요즘 조금 예민하지만 함께 요리할 땐 편하게 말한다. 얇게 썬 레몬을 설탕과 함께 재우면서 이야기는 이어진다. 딸아이의 이야기를 더하여 재워진 레몬청이 잘 맛 들여질 것 같다.
가족들과 함께 달고나 커피, 쿠키, 딸기타르트, 수제비, 만두 등을 주말에 함께하며 코로나 집콕 생활을 할 수 있어서 참 좋다. 코로나 펜데믹으로 불편함도 있었지만 우리 집은 바쁨으로 가려진 소중함을 찾았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적음을 더 아쉬워하는 중에 우리는 함께 모여 ‘요리‘라는 놀잇감을 찾음이 감사하다.
오늘은 뭘 먹을까? 냉장고 안에 뭐가 있는지 생각해본다. 빨, 주, 노, 초 알록달록한 채소와 다양한 재료로 뭘 할까? 오늘도 전화를 할 남편과 딸 아이의 목소리를 기다린다.
와~~~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준비하며 너무나 즐거운 일상을 보내고 계시는군요... 정말 보기 좋습니다. 감사해요^^
달리기만 하던 인생길에 사고로 잠간 도로공사가 있어 멈출수 밖에 없는 상황인듯 멈춤으로 비로서 내가 걷는 길옆에 풍경도 보고 바람도 들꽃도 그리고 잡초중 행운의 클로버도 찾아보는 쉬는 타임인듯 해요~모두 충분한 휴식을 취하시고 더 가벼운 걸음 으로 인생길을 걷기 바랍니다.
역시 가족이 무언가를 같이하기엔 요리 만한것이 없는듯요~~
놀이가 일상으로~~~~~
코로나로 인해서 불편함도 있지만 보이지않던 소중함을 볼수있는 마음이 생긴거 같아요..가까이 하면서도 서로를 너무 몰랐던 어쩌면 우리가 잊고 있었던 초심을 기억하기위한...지금 딱 그런시간이 아닌가싶네요..너무 바쁘게 살아서 한템포 쉬었다가라고.ㅇ..ㅇ
한 템포 쉬었다 가라고... 정말 좋아요^^
글쓰기는 언제가 부담입니다. ㅠㅠ
맞아요. 그냥 편안하게 나의 생각을 담는다 생각하면 좋겠어요. 마지막 ps가 인상적입니다...
에헤이 ㅋ 이야기 주머니를 털어주세용 ㅋ
김미희 아름님의 글쓰기입니다.
*어르신들은 놀이가 약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아이들에게 놀이가 중요하다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놀이는 아이들만 필요하다고 생각이 들지 않는다. 놀이는 누구에게나 필요하다고 느낀다.
코로나19가 오기 전에 플레이스타터 어르신분과는 어르신들을 모시고 신체활동, 책읽기, 푸드아트 표현놀이 , 손유희, 여러가지 게임도 하면서 어르신들과의 놀이을 하였다.
그 활동을 할 때 어르신들의 표정을 보았다. 너무 행복해하셨다. 몸은 불편하시고 몸과 마음은 따로지만 열정적으로 따라 하시는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놀이는 누구에게나 필요하다고 생각을 했다.
어르신들과 함께 놀이를 할 때 어르신들의 즐거워 하시는 모습을 보면 나의 마음도 어린이가 되어 스트레스도 확 날려졌다. 빨리 코로나19가 종식이 되어서 어르신들 앞에서 재롱아닌 재롱을 부리는 시간이 오길 기다려진다.
나의 어린 시절엔 어떠한 놀이를 하면서 놀았나, 타임머신을 타고 60년대 어린시절로 가 보겠습니다.
놀이는 공기놀이,고무줄 놀이, 말뚝박기,줄넘기등등이 생각이 나네요.
그 중에 고무줄놀이를 많이 한 것 같아요. 아!!! 난 옛날 사람이다. 지금은 초등학교라 부르지만 내가 학교다닐 때는 국민학교라고 했다. 그 시절에는 공부보다 놀기를 더 좋아했던 것 같았다.
쉬는시간, 점심시간, 수업 끝나고 집에 안가고 놀던 때가 나에게도 있었다.
자! 그럼 놀아 볼까요?
엄지 손가락을 내밀면서 고무줄 놀이 할 사람 여기여기 붙어라 ~~~~
친구들과 우르르 운동장으로 뛰어 나가서 놀이를 한다. 고무줄 놀이에 맞는 노래를 부르면서 노래는 기억에 이슬비, 금강산 등을 부르면서 하고 있을 때 개구쟁이 남자 아이들이 칼을 들고와서 고무줄을 끊고 또 여자아이들 치마를 아이스케키하고 치마를 들추면서 도망을 가면 여자아이들은 '으씨', '야!!! 너희들 거기 서 잡히면 죽는다' 하면서 쫒아가서 뒤통수를 때리곤했다.
놀이란 시대를 떠나 누구에게나 시간과 장소만 허용한다면 누구에게나 필요로 한다. 또한 놀이는 누구에게나 생기를 주고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름님이 고무줄 놀이를 하며 운동장을 뛰어 놀던 시간이 눈에 선합니다. 그 아름다움을 지금의 모습에서 언뜻언뜻 보며 생기를 느끼곤 했어요... 멋진 글 고맙습니다^^
어르신은 놀이가 약이다... 아름님... 너무 좋은 제목입니다. 감동^^
"어르신들은 놀이가 약이다" 그리고 어른이들도 놀이가 약이다 ㅋ
어른이 되면서 놀이의 옷이 어른스럽게(소위, 있어보이게) 변한 것 같아요. "코카콜라맛있다 맛있으면 또 먹지 ㅋㅋ" 이렇게 편을 가르기도 했던 것 같고 "대댄치?"이런 것도 했던 것 같고... ㅋ 아 어느새 이런 것을 추억할 내가 되었는지...
: PLAYFUL LIFE MEMORY
오늘은 우리 집 뽐내기 대회가 있는 날이다. 우리 집은 일주일에 한 번 저녁밥을 먹고 난 후 거실에 온 가족(외할머니, 아빠, 엄마, 나, 여동생, 남동생)이 모여 아빠가 준비해주신 무대에서 나와 동생이 장기자랑을 하며 ‘우리 집 뽐내기 왕’을 겨룬다. 1등, 2등, 3등과 상품이 있는 대회가 시작이 된다.
뽐낼 장기자랑이 잘 준비되거나 새로운 장기자랑 아이템을 얻을 땐 대회가 빨리 시작되길 기다리는 마음이 조바심 난다. 뽐낼 장기자랑 거리가 없고 준비도 안되면 대회에 나가기가 참 싫다. 그렇지만 늘 응원해주고 웃어주시며 ‘최고다 ’ 해주시는 외할머니, 아빠, 엄마 모습이 좋아서 하게 된다. 하고 나면 신기하게 즐겁고 신이 난다.
오늘은 이 날을 기다리며 일주일 동안 준비한 노래와 율동을 뽐냈다. 역시 아빠는 ‘민경이 최고!’를 크게 외쳐주신다. 엄마는 힘껏 박수쳐 주시고 사진도 찍어주셨다. 외할머니와 동생들은 박수를 치고 나를 따라 춤을 추기도 했다. 기분이 진짜 좋았다.
무대에서 인사를 하고 내려오니 오늘도 아빠는 볼뽀뽀를 해주시고 외할머니는 따뜻하게 안아주셨다. 동생들의 뽐내기 장기자랑을 모두 마치고 엄마가 준비하신 간식을 모두 맛있게 먹었다.
어린 시절 추억으로 저장된 놀이기억 하나를 꺼내본다.
언제부터 우리 집 놀이문화가 되었는지 그 시작은 모르겠지만 초등학교 5학년(12살)까지 매 주 저녁밥을 먹고 난 후 열렸던 ‘우리 집 뽐내기 왕’ 대회가 있었다. 주로 나와 여동생, 남동생 셋이 장기자랑을 뽐냈지만 가끔 아빠도 출연하시고-우스꽝스런 광대 얼굴과 동물 모사를 주로 하셨다-외할머니께서 흘러간 옛노래를 불러주시기도 했다. 엄마의 장기자랑은 대회가 끝나고 모두 둘러앉아 먹는 간식이거나 우리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다.
부모님은 사업을 하셨는데 365일 밤 1시에 일을 시작해서 아침 10시가 되어 집으로 오셨다. 집에 오시면 부모님은 주무셨고 외할머니께서 나와 동생들을 돌봐주셨다. 점심이 한참 지나면 부모님이 일어나셨고 늦은 점심을 드시는 부모님 곁에서 나와 동생들은 한 숟가락씩 받아먹는 맛에 입을 서로 벌리고 자리싸움을 하곤 했다. 외할머니께서 준비해주시겠다는 밥상도 마다하고 늘 부모님의 늦은 점심을 빼앗아 나눠 먹었다.
식사를 마치시고 아빠는 거래처로 수금(받을 돈을 거두어들임)을 하러 가셨고 돌아오실 땐 늘 간식이나 선물을 사 오셨다. 아빠의 손에 들려진 봉지가 더 커진 날은 어김없이 뽐내기 대회가 있는 날이었다. 그런 날은 수금이 잘 되었거나 일찍 끝난 날이다.
무대는 아빠 담당이었다. 이불을 몇 채 겹쳐 폭신한 매트처럼 만드셨는데 나중엔 나무를 톱질하고 망치질해서 만드셨다. 1등, 2등, 3등 봉-미스코리아 진, 선, 미 같은-도 만드셨다.
봉은 계속 반납과 수여를 반복했다 ㅋㅋ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갑자기 엄마가 아프셨다. 그래도 대회는 계속 되었는데 엄마가 더 아파지셔서 아빠는 무대를 꺼내지 않았다. 무대와 봉은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밤낮이 바뀐 일상을 살아가시는 부모님이 최선을 다해 ‘놀이’를 통해 사랑과 응원을 듬뿍 먹여주신 기억이 있어 지금의 내가 있는 것 같다. 놀이의 기억을 통해 나를 만나고 이제는 나이 드신 부모님을 다시 바라보게 된다.
나의 놀이 MEMORY로 PLAYFUL LIFE를 이어간다.
김두성 아빠, 조혜숙 엄마 사랑해요. 감사해요.
하늘에 계신 유은옥 외할머니 사랑해요. 감사해요.
우리집 뽐내기 왕... 미소가 지어지는 풍경입니다. '나의 놀이 MEMORY로 PLAYFUL LIFE를 이어간다.' 참 좋아요^^
우와!! "우리 집 뽐내기 대회가 있는 날" 너무 갖고 싶은 날이에요- 온 가족이 즐겁게 동참하는 문화를 만드셨다니 너어어어무 감동이에요 ㅋ 딸기님의 에너지의 원천은 놀이와 사랑이 가득한 가족이셨군요 ㅎ
글을 읽고 나니 감동적인면서도 눈물이 핑 ,,뽐내기 대회 우와 쉽지않은 가정문화네요 좋으네요
일상의 순간 중 하나,
올 해 설도 집콕을 했다.
집콕을 오래하다보니 타인의 삶을 더욱 이해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는 것 같다.
물론 타인의 삶이라고 거창하게 말하기엔 지극히 산발적이고 제한되어 꺼내기는 좀 부끄럽기도 하다. 그냥 이웃의 삶, 나의 삶, 누군가의 삶이라고 할까보다.
인간극장, 다문화고부열전, 황금연못 등을 가끔 본다. 좋아한다고 말하기엔 조금 부족하고 그렇다고 스치다 보는 프로치고는 챙겨본다.
이 프로그램에서 나를, 신랑을, 부모님을, 시부모님을 그리고 이웃을 보게된다. 물론 작가들이 있어 짜여진 부분이 있겠지만 그 안에 분명 그저 우리의 삶이 녹아져있기 때문에 마치 누군가의 일기장을 공식적으로 보는 느낌이다.
'아..아니지 저러면 안되지'
'에구에구 어떻게...힘들겠다'
'아앜 시대가 어느 땐데!!'
혼자 이렇게 쌍방향 프로그램을 만들어 버린다.
그러다 문득 나의 자세를 보게된다.
엄마가 보였다.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네 엄마야...
아들 딸이 다 출가한 엄마는 혼자 이렇게 테레비와 친구하며 하루를 보내신다.
코로나 이후에는 더더욱.
아직 인생은 60부터라고 하지만.. 엄마한테는 잘 모르겠다..
젊은 시절 이래저래 맘고생이 심했던 누구보다 부지런한 밝았던 엄마는 이제는 몸이 많이 아파 엄마가 정한 삶의 기준이 적용되는 조용한 삶을 추구하신다. 아주 가끔 통하면 또 깜짝 놀랄만한 대장부같은 일을 하시기도 하지만...
뭔가 하자고 하면,
"엄마는 아파서 힘들어."
"너나 해."
"어차피 멀리 못 가."
나는 예쁜 우리 엄마가 아직 한창인데 아직 볼 것도 할 것도 많은데...
내 모습에서 엄마가 자꾸 나타난다. 그래서 슬퍼서 더 논다.
나라도 밝게 신나게 놀아서 흔적을 여기저기 흐트려놓으면
분명 그 중 하나는 엄마가 혹 할테니까 말이다.
엄마의 00번째 봄날은 아직 안 온 것 같다. 동절기가 너무 길다...
엄마의 봄날에는 나도, 아빠도, 동생네도 모두 출연했으면 좋겠다.
두서없는 일기 끝!
#playfulmylife #playful my life #playfullifeathome #playful at home
세나님 글을 읽으며 사랑스러운 딸의 모습이 그려지네요. 예쁜 엄마와 함께 아름다운 추억 만들어 갈 그날을 응원할게요. ^^*
나이들어가는 친정엄마를 볼 때는 마음이 아프죠 전화해서 일상을 묻는게 이제는 당연히 할일이 되었네요 아직까지는 무릎, 관절등이 편찮으시지만 일상생활 잘해 주심에 감사하는 마음이 듭니다.
@아이비 :)
꽃밭에서
- 김숙영 -
따스한 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는 겨울의 끝자락, 강추위가 계속 되었던 터라 오랜만에 만나는 햇살이 무척 반갑다. 냉기 때문에 오래 들여다 볼 엄두가 나질 않았던 베란다 꽃밭에도 모처럼 온화한 기운이 맴돈다. 추워서 화초들에게 물을 주는 일을 미루고 있었는데 이젠 더 이상 게으름을 피울수 없게 되어 수도꼭지에 연결된 호수로 물을 뿌려주었다.
화초 잎사귀에 쌓였던 먼지가 씻겨 나가면서 싱그러운 초록빛 잎사귀가 눈이 부시다.
베란다에는 100여개가 넘는 잡다한 화분들이 있다.
겨울날의 시린 하늘만 보이는 하늘도 가리고 싶고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꽃들이 그리워서 하나 둘 들여 놓다 보니 지금의 꽃밭이 만들어졌다.
엄동설한에도 화사하게 꽃을 피워 올리는 제라늄과, 정열적인 빛깔의 시크라멘이 눈길을 사로 잡는다. 어느새 춘란이 꽃대를 올려놓고 긴기아난은 순백의 꽃들을 피워올리며 매력적인 향기를 맘껏 발산하고 있다. 작년 10월에 파종한 시크라멘도 옹기종기 싹을 올리며 봄을 준비하고 있다.
햇살 아래에서 오랜만에 물을 주면서 시든잎을 따주고 가지들을 전정하다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친정 어머니께서 좋아하시던 아잘레아가 꽃봉오리를 내밀고 있는 화분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지금은 함께 바라볼 수 없는 빈자리가 느껴져 가슴에 서늘한 바람이 들어온다.
꽃을 좋아하시던 친정어머님께서는 봄이 되면 꼭 아잘레아를 사다 꽃밭에 심으셨다.
마당 한켠에 그리 넓지 않은 꽃밭이었지만, 백합, 장미, 국화, 수국, 단정화, 채송화, 봉숭아등 갖가지 꽃들이 심어져 있었다. 어머니의 부지런한 손길 덕분에 집안은 항상 꽃으로 가득했고 대문에는 아치형의 새빨간 넝쿨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 오월부터 유월까지 환상적인 풍경을 만들어 냈었다.
하얀눈이 내리는 날엔 설중매의 고혹적인 향기가 눈밭을 서성거렸고. 샛노란 수선화에 감격할 즈음엔 겨우내 맨 몸둥이로 견뎌낸 가지에서는 시샘하듯 연둣빛 새싹들이 터져 나왔다.
연분홍 꽃들이 하나둘 터지는 진달래꽃을 바라보고 있으면 가슴속 어둔방에도 연분홍 등불이 하나씩 켜졌다. 수국이 피어나는 오월의 꽃밭에서는 ‘봄날은 간다’를 부르시며 수줍게 웃으시던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뜨거운 여름날을 보내고 나서 가을의 꽃밭에서 만난 국화꽃 향기는 쓸쓸함이 가득 베어 있어서 그리운 얼굴들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어머니께서는 철이 바뀔때면 시들은 꽃들을 솎아내고 새로운 꽃들을 심으시느라 늘 분주하셨다. 어떤때는 어둠이 내릴때까지 꽃밭에 계셔서 늦은 저녁을 먹은 적도 많았었다.
쉬는날이면 하루종일 베란다에서 노는것도 모자라 저녁때가 되어도 꽃밭을 손질하고 있는 내게 남편이 슬그머니 다가와 "재밌어?" 라고 묻는다,
나만의 꽃밭에서 해질 때까지 맘껏 자유로움을 느끼며, 무아지경에 빠져 일상놀이를 즐기는 순간이야 말로 최고로 행복한 시간이다.
꽃밭을 가꾸다가 혼자 맡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꽃향기를 만난 날에는 남편을 부른다.
못이긴듯 나와 지긋이 꽃향기를 맡는 남편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당 곳곳에 새로 피어난 꽃들을 가리키며 자랑스레 보여 주시던 어머니 모습이 생각난다.
겨울 날씨로는 드물게 화창한 날씨에 꽃단장을 끝냈다.
햇살 아래에서 반짝이는 화초를 보니 당분간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꽃들을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마음이 편안하다. 베란다에 마련한 나의 꽃밭을, 많은 날 정성이 깃든 어머니의 꽃밭과 비교하기에는 부족하지만, 꽃을 돌보면서 느끼게 되는 희열과 평온한 느낌은 어머니의 꽃밭에서 느끼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햇빛 좋은 날 하나씩 터지는 꽃봉오리와 새싹들의 매력에 취해서 꽃들 사이를 옮겨 다니다 보면 울적했던 마음도 눈 녹듯 사라져 버린다.
철 따라 그리움으로 피어나는 꽃과, 애잔함으로 떨어지는 꽃들이 있고 , 물만 먹고도 아름다운 꽃잎을 만들어 내는 요술 같은 이곳은, 마음속의 나와 반갑게 조우할 수 있는 소중한 곳이다.
겨울의 끝에서 꽃피는 봄날은 아직 멀었는데, 성급한 군자란은 벌써 기다란 목을 내밀어 꽃을 피우고 있다. 형형색색의 꽃봉오리를 달고 있는 카랑코에와 달콤한 향기가 매력적인 만리향이 벌써부터 봄을 안고 있어서 머지않아 베란다에는 꽃들의 향연이 펼쳐질 것이다.
그때쯤이면 언니와 함께 어머니를 추억하며 예쁜 꽃차를 만들어 마시리라.
100가지 대단해요 저는 잘 못키워요 저희 친정엄마께서도 죽어가던 것도 살리시는데 아이비 님도 꽃을 키우는 시는 정원사 이시네요 글을 읽으면서 베란다의 모습이 그려져요 기회가 된다면 가보고 싶에요 다는 모르지만 아는 이름의 꽃이 나오니 반갑네요 카랑코에 ,제라늄 색색별로 피면 너무 좋아요 보기만 해도 미소가 지어지는 꽃들 예뻐요
'언니와 함께 어머니를 추억하며 예쁜 꽃차를 만들어 마시리라." 뭔가 연극의 서막같아요.
언니라는 존재가 있으면 좋겠다 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는데- 언니든 동생이든 자매는 행복한 것 같아요. 남매는 각자의 가정이 생기면 쉽지 않더라고요 삶의 방향도 다르고 또 사는 무대가 다르니...
꽃을 좋아하시던 친정어머님 덕분에 "집안은 항상 꽃으로 가득했고 대문에는 아치형의 새빨간 넝쿨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 오월부터 유월까지 환상적인 풍경을 만들어 냈었다."
머리 속에 그려져요- 아 제맘대로이긴 하지만-
그 추억이 너무가 부러워요-
저희 외할머니도 꽃을 좋아하셨는데 그 꽃 중에 하나를 엄마가 정성스레 키우시면서
할머니 오셨다 하셔요. 그럼 저도 "어머 할머니 오셨네~" 하면서 인사를 하죠-
정확히 꽃 이름은 모르겠는데 주황빛의 그 꽃이 피면 색이 주는 에너지와 할머니 추억이 합쳐져서 괜시리 마음이 가득차지더라고요.
아이비님께서 왜 글쓰기를 주저하셨는지 그 이유를 이 글을 읽고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 정성껏 아름답게 쓰셨네요... 흑흑흑... 감동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경험을 이렇게 정리하고 글로 남겨 이웃과 공유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그런 꿈을 꾸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엄청난 탈고를 하셨을 것 같은 글... 수고 많으셨어요^^
평범하면서도 의미있는 나의 일상
오늘도 나의 하루는 바쁘게 시작됐다.
새벽에 일어나 남편의 아침 밥상을 차리고 남편이 식사하는 동안
파프리카, 오이, 토마토 등 야채를 깨끗이 씻어 정성껏 썰어 통에 담아둔다.
그리고 티포트에 말린 팽이버섯을 담아 팔팔 끓여 팽이버섯차를 우려내
큰 텀블러에 가득 담는다.
이런 모습이 나의 일상의 첫 시작이다.
야채와 차를 챙겨서 남편의 출근길을 배웅하고 이제 외출을 준비한다.
오늘은 어르신들과 스포츠스태킹 봉사로 만나는 날이다.
참 편안하고 의미있는 시간이다.
준비를 마치고 먼저 교육장소에 가 세팅을 하고 어르신들을 기다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르신들이 한분 한분씩 들어오시며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코로나로 마스크를 하고는 있지만 그 눈빛에서 반가움이 느껴진다.
한주간의 안부인사를 반갑게 나눈 후 가벼운 신체운동으로 시작한다.
원래 정해진 동작은 있지만 어르신분은 그저 덩실덩실 흔드시면서도 그져 즐겁다.
오른쪽 왼쪽 위 아래 규칙없이 흔들어댄다.
신나게 한바탕 흔들고 나서 스포츠스태킹 컵을 가지고 쌓고 내리고 널고 걷는다.
지난주에 했었던 프로그램이지만 또 다시 새롭다.
그런 와중에 한번씩 아는 부분이 나오면 “맞어 맞어” 이러시면서 한박자 늦게 따라하신다.
그 모습이 어른이지만 어린아이같이 귀엽다라는 생각까지 든다.
새로운걸 배울땐 한번 두 번 따라하다 잘 안되면 “내가 손이 아파서 잘 못해, 손이 아파서~”라며 잘 안되는 것을 합리하하고자 하신다
그런 모습을 보며 난 “괜찮아요, 처음엔 다 그래요. 천천히 연습하다보면 잘 되실거예요”라며 안심시켜 드린다.
그렇게 핑계를 대면서도 연실 손은 컵을 옮겨가며 연습을 하고 계신다.
때론 옆 친구분들이 잘 하고 계시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다급해져 급한 마음에 컵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그런 과정에서 어쩌다 한번 성공했을때는 박수를 치시며 소리를 지르며 해맑게 웃으신다.
한참을 컵을 가지고 놀다보니 어느새 마칠 시간!
한 어르신이 컵을 가지고 놀다 보니 허리아픈 것도 잊고 있었다며 웃으신다.
다음주에 다시 만날 약속을 하며 모두 교육장을 나가신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난 미소를 짓고 오늘의 일상이 또 이렇게 지나가고 있다.
와~~~ 황샘의 봉사를 글로 만날 수 있어 너무 기쁩니다. 고맙습니다^^ 스태킹 컵쌓기... 저도 황샘에 배우고 싶네요^^
예전에 스태킹 컵쌓기 들어 본적있었는데 멋지세요. 나눔을 하며 산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신데 좋은 봉사를 하시네요. 함께 하시는 어르신 분들도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셨으면 좋겠네요 모두 파이팅 입니다.
나의 '플레이플 라이프(Playful Life)'는 '용기'다.
'어머, 내 이야기다.'
최근 존스 홉킨스 소아정신과 지나영 교수의 영상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날은 갑자기 찾아왔다.
아마 전조 증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구안와사..대상포진 등등"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갑자기 온 몸은 누가봐도 멀쩡한데 마치 바닥과 나 사이에 아주 강력한 접착제가 있는 것처럼 난 일어나지 못했다.
그 일이 일어나던 날도 지인을 돕기위해 주말을 반납하고 거마비정도도 사양하며 그저 일을 도왔다. 사람들은 내가 그 가게의 주인인 줄 알고 나때문에 온다할 정도였으니 꽤나 단골고객들을 불러모으는 재미에 더 신명나게 했더랬다. 여느때와 다름없이 토요일 열심히 불태우고 일요일이 되었다. 그리고 일어나지 못했다...
'어? 뭐지? 가위눌린건가?' 몸이 안 움직였다. 언제나 함께했던 당시의 남자친구이자 지금의 신랑이 옆에 있었다. 그래서 소리를 내보기로 했다.
"아- 아아아. 가나다라마바사" 인기척에 깬 신랑이
"왜? 왜 그래?" 물었다.
"몸이 안 움직여져.. 뭐지? 나 안 아픈데...이상해.."
그렇게 나는 약 일주일간 꼼짝없이 누워있었다.
정말 세상 신기한 경험이었다.
'와 일어나고 싶은데 일어날 수 없다니...'
그리고 어느 병원을 가도 나는 병명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결국 직장도 바꾸고 다양한 환경에 변화를 주면서 해가 흘렀다.
연례행사처럼 다양한 모습으로 찾아오는 그 친구를 맞이한다.
그리고 그 친구와 이별하면 또 용기를 내어 삶에 도전하고 쉼을 반복한다.
그리고 매일매일 에너지를 조절하며 하루하루를 관리한다.
어쩌면 세상이 나에게 알려주는 "나를 돌아보는 시간, 나에게 올인하는 시간, 나를 공식적으로 놀리게 하는 시간"이다 라고 하는 건 아닐까 한다. 물론 나말고는 측근에 경험자가 없어 좀 어려울 때도 많고, 여전히 무언가를 온 마음을 다해 맞이하고 해내려는 내가 걱정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자율신경계가 허락하는 만큼 열심히 즐길 용기를 내어본다.
그리고 내려놓고 쉬는 용기도 낼 수 있음에 대해 흔들리는 여린마음을 지지한다.
"사랑한다, 팅코벨이, 님 좀 짱인듯"
#playfulmylife #playful my life #playfullifeathome #playful at home
아... 아직도 원인을 알 수 없으시군요... 이런... 왜 플레이플 라이프가 용기인지 알겠어요... ㅠㅠ 항상 최선을 다하시는 한샘...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응원합니다^^
원인도 모르시다니 답답하시겠어요 항상 미소를 보이셔서 아픈지 몰랐어요 힘내라는 많이 들었겠지만 그래도 힘내세요
연례행사처럼 찾아오는 그 친구를 현명하게 맞이하고 있는 세나씨 !
용기있게 도전하는 삶이 아름다워요. 화이팅 이예요.
ㆍ우리는 숨쉬는 놀이터 친구ㆍ
숨쉬는 놀이터에 아이들이 왔다.
작년(20년 11월)에 코로나19 단계가 격상하여 문을 닫은지 12주만에 숨쉬는 놀이터가 다시 문을 열게 되었다. 놀이터도 아이들과 함께 드디어 숨을 쉬게 되었다.
오늘은 더 반가운 플레이스타터들이 자녀들과 함께 놀이터를 찾아왔다. 놀이터 문을 들어서는 아이들도 플레이스타터들도 얼굴이 밝은데 한 친구가 얼굴이 어둡다. 놀이터를 누비며 아이들과 함께 놀거나 뛰지도 않는다. 사랑방 주변의 책상곁에서 빙빙 맴돈다.
마스크 위로 보이는 작은 눈으로 계속 누굴 찾거나 나를 살핀다.
"안녕"
인사를 건네본다.
눈으로만 인사를 돌려보낸다.
"안녕"
다시 인사를 건넸다.
손만 살짝 흔들어준다.
플레이스타터인 엄마가 곁에 다가와 조용히 이야기를 해준다. "전에 계시던 보라선생님이 안계신다고 했더니 그래요. 보라선생님과 잘 놀았거든요."
아! 하!!
"안녕, 내 이름은 딸기야."
아이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온다.
"나는 보라친구야. 지안이도 보라선생님알지?"
지안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지금은 보라선생님 안 계시는 거 알아요"
라고 좀 더 가까이와 답해준다.
"맞아, 보라선생님은 지금 안 계서. 난 숨쉬는 놀이터 1호에서 있다가 여기에 왔는데 아직 놀 줄을 몰라. 지안이도 그래?"
하고 물으니
지연이의 눈이 마스크 위로 반짝인다.
"내가 알려줄게요"
지안이가 숨쉬는 놀이터 2호에서 못 놀고 있는 나에게 놀이터를 소개해주고 앞장서서 노는 걸 알려준다. 나무 언덕을 오르고 밧줄과 나무 다리를 건너는데 도통 나무언덕을 미끄러져 내려올 수가 없다. Why? 무서워서
무서워하는 나를 지그시 보더니 자기가 10번 나무 언덕 미끄럼을 타는 걸 보라한다. 그러더니 분주하게 오가며 나무 언덕 미끄럼을 탄다.
"자~봐요. 이제 10번이예요"
금새 내려간 지안이가 나무 언덕에 앉아있는 나를 올려다 보는데 지안이의 머리카락 사이로 땀방울이 보인다.
내마음이 순간 덜커덕 하고 열려지고
환하게 따뜻한 볕과 바람이 들어온다.
"지안아, 딸기 내려갈게"
크게 외치고 눈 찔끔 감고 나무 언덕을 내려간다. 다 내려와서 일어 서는데 모양새 빠지게 주저 않는다(다리에 힘이 ㅋㅋ)
내친구 지안이가 젤 기뻐하며 칭찬해준다.
그리곤 한 번 더 타자고 한다.
친구따라 한 번 더 나무 언덕 미끄럼을 타겠다고 올라와 앉으니 지안이가 불쑥 텀블러를 나에게 건넨다.
"딸기도 마셔. 이건 우리 엄마껀데 물일 수도 있고 홍차일 수도 있어"
하며 지안인 자기 텀블러에 담긴 물을 마시고 나에겐 엄마 텀블러라며 건넨다.
하 하 하
귀엽고 사랑스러운 꼬마친구다.
놀이터에 있으니 내 자녀보다 한 참이 어린 놀이친구도 사귀고 참 좋다.
놀이터에 있으면 아이들이 온다. 친구들이 많아진다.
갑자기 숨쉬는 놀이터 3호 공사중 지원업무로 들렸을 때 갑자기 놀이터에 들어와 잠시 만났던 친구들이 생각난다.
"여기 숨쉬는 놀이터예요? 저희 숨쉬러 왔어요"
라며 놀 수 있냐던 청소년 4명이 보고 싶다.
친구야, 기다려 곧 숨쉬는 놀이터에서 보자^^
#PLAYFUL_LIFE_IN_COMMUNITY
#PLAYFUL_LIFE_WITH_FRIEND
하하하... 놀이터에서 놀이 친구를 찾았던 주은이... 딸기가 새 친구가 되어 주셨군요... 고맙습니다. 저도 놀이터에서 미끄럼틀을 타 보았지만 얼마나 무섭던지... 아이들은 왜그렇게 겁이 없나 모르겠어요^^ 하하
놀러 가는 놀이터에서 놀이 친구가 되어 주던 벗들을 찾는 아이들의 눈길이 사랑스럽고 그 친구들에게 새 벗이 되어 주시는 활동가들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참 고맙습니다.
딸기님 잠시 동심으로 돌아가 어린 친구와 함께 재미나게 노는 모습이 보기 좋아요. 이젠 나이가 있어서 생각대로 안되죠?
눈높이를 맞춰주는 딸기님! 정말 멋지십니다.
어두웠던 아이의 얼굴이 밝게 펴지는 모습이 그려지네요
노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신 여사의 playful life : 끝없는 내리 사랑
5기 라이언 김민정
남편은 4남 2녀 중 셋째아들이다. 위로 형 두 명이 있고 밑으로 동생이 셋있다. 따라서 나는 셋째 며느리이다. 나는 결혼하고 27년 동안 시집살이라는 것을 겪어 보지 않았다. 시어머니의 사랑과 배려를 받으며 살았다.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바라는 바가 없나? 싶을 정도로 우리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뭘 해달가거나 갖고 싶다거나 원하시는 것이 없다.
나는 안부전화를 잘 하지 않는 편이다(누구에게나 전화를 잘 하지 않는 편이다). 어머니에게도 마찬가지 인데 굳이 변명을 하자면 큰아주버니 가족과 함께 살고 계시고, 어머니가 병원에 가실 때나 어머님이 필요한 것이 있을 때는 가까이 살고 있는 딸들이 다 챙겨드리고 있는 것도 안심이 되어 전화를 잘 안하게 되는 이유도 있다. 물론 여기에 필요한 비용은 형제, 자매가 모은 공금을 사용한다. 한 번은 어머님이
“너는 전화를 너무 안한다. 어찌 살고 있는지 궁금하니까 전화 한 번씩 해라”
“네~~ 전화드릴께요” “근디 무소식이 희소식인께...... 넘 기다리지는 마셔용~^^”
“지랄한다”
분명 욕을 하시는데 눈은 웃고 계시다. 귀여워하시는 게 느껴진다.
나는 시골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다(편식이 심한 편이기도 하고). 그래서 신혼 초부터 지금까지 나는 시골에서 잘 먹지 않는다. 안 먹고 깨작거리는 며느리가 미울 만도 한데 그런 며느리를 늘 한결같이 걱정하시고 안쓰러워하신다.
잔소리나 야단치실 일이 있어도
“예쁘다 예쁘다 다 네가 잘해서 그런 거다” 긍정적인 모습을 보고 칭찬을 해주신다. 나중에 알았는데 우리 어머니는 문맹이시다. 어렸을 적에 아들만 공부시키고 딸들은 공부를 안시킨 것이 두고 두고 한이 된다고 하셨다. 어쨌든 공부는 못 배우셨어도 참 지혜로우신 분이시다.
우리 어머니는 며느리들에게 농사일을 안 시키신다. 그런데 고추 달라고 하면 커다란 봉투를 내 손에 쥐어 주시고 나를 앞장세워 고추밭으로 데리고 가서 크고 예쁜 고추를 따서 봉투에 담아 주신다. 때로는 깻잎, 때로는 호박, 상추, 어떨 때는 열무…….
“어머니 고구마 순 좀 주세요” 하면 너무 좋아하신다. 내가 고구마 순을 달라고 하면 역시 커다란 비닐봉투를 꺼내서 내 손에 들려주시고는 고구마 밭으로 데리고 가셔서 실하고 예쁜 순만 따서 내가 들고 있는 봉투에 가득 가득 담으신다. 나는 봉투만 들고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한가득 꺽은 고구마 순을 그늘에 돗자리 깔고 마주 앉아 껍질까지 다 까주신다. 며느리 농사일은 안 시키셔도 며느리에게 줄 작물을 딸 때는 항상 앞장 세우고 논으로 밭으로 데리고 다니신다. 그렇게라도 같이 있고 싶으셨던 것 같다.
지난 추석에 코로나 19로 인한 강력한 거리두기 정책으로 고향방문을 삼가라는 캠페인이 연일 방송에 나올 때 어머님이 전화하셔서
“마을에서도 오지 말라고 하니 너거도 오지 마라잉”
마음은 불편했지만 정부정책도 따르고 어머님을 비롯한 시골 어르신들의 건강도 염려되어 추석에 고향방문을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추석이 지난 후 어머님이 남편에게 전화하셔서
“그래도 다른 집 자식들은 다 왔더라”, “오지 말라 했지만 그래도 올 줄 알았다”
정말 서운해 하셨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어머님이 이렇게 자식에게 서운하다고 하신 경우가 거의 없었기에 놀랐었다. 구정에도 5인 이상 집합금지로 인해 시골을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그런데 어머님이 전화하셔서 올 거냐고 물어보시기에
“갈거에요. 어머니”
대답은 했지만 매우 걱정이 되었다. 나라에서는 하지 말라하고 어머니는 꼭 오기를 바라시고
인원을 줄이기 위해 우리 부부만 가기로 하고 시골 가기 전까지 외출은 삼가하고 조심 또 조심하면서 혹시 있을 불상사를 줄이려고 노력하였다. 되도록 접촉을 피하기 위해 새벽 4시 출발~~~ 적진으로 침투하는 특전사처럼 화장실도 제대로 못가고 조심조심 시골에 도착하니 어머님이 차 소리만 듣고 활짝 웃으시며 주차장으로 마중을 나오신다.
“아이고 고생했다”, “새벽에 오느라 고생 많았다”
내 손에 든 옷가방과 짐을 받아주신다. 저렇게 좋아하시는데...... 안 왔으면 어쩔 번했나 오는 내내 조마조마 했지만 그래도 잘 왔다는 마음이 든다.
보통 때는 대체로 어머니는 아침 드시면 마을회관으로 가셔서 거기서 마을 어르신들과 놀고 점심 드시고 저녁 무렵에 집으로 돌아오시는데 올해는 설날 이후 일주일동안 자체적으로 자가 격리를 하기로 마을에서 의견을 모았다고 하신다. 따라서 결혼한 이래 처음으로 명절 내내 어머니와 꼬박 함께 있었다. 내가 먹을 라면 끓이며 예의 상
“어머니~ 라면 드실래요?”
“그래 같이 먹어보자”(어머니는 라면을 거의 드시지 않는다).
어머니 드시기 편하도록 푹 익혀서 드리니 호로록 호로록 맛있게 드신다. 커피까지 타 드리니 고맙다하신다. 하루 종일 뒹굴뒹굴 미스터트롯 보면서 ‘나는 누가 좋더라’, ‘누구는 어떻더라’며 시시콜콜 수다를 떨었다. 그러다 허리 아프면 눕고 졸리면 자고 배짱이처럼 하루 종일 어머니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명절 내내 이렇게 어머니와 함께 있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이 또한 재미난 경험이었다. 다음날도 종일 먹고 자고 tv보면서 뒹굴고 있는데
“민수야~~ 저기 동내 한 바퀴 돌고 오자” 옆에 있는 아들도 아닌 며느리에게 산책가자 하신다. 이런 적이 없어서 조금 의아했지만 가볍게 잠바를 걸치고 마스크 쓰고 따라 나섰다. 운동 삼아 동네를 한 바퀴 돈다고 하신다. 요즘 기력이 자꾸 쇠하시니 본인이 아파서 자식들이 힘들어질까 걱정되어 스스로 운동을 하시는 것이다. 참 감사하다. 아이들이야기, 동네 누구누구네 이야기를 하면서 천천히 걷는데 어머님 발걸음이 점점 느려지더니 허리가 아프시다면 서 남의 집 대문 옆, 길에 주저앉아 가쁜 숨을 내쉬신다. 나도 어머니 옆에 앉았다. 걱정이다. 고관절과 허리 통증으로 고생이시다. 우리 시골은 남쪽이라 겨울에도 그리 춥지 않다. 따뜻한 햇볕을 쬐며 앉아 있는 것도 괜찮았다. 그렇게 20여분을 쉬고 다시 걸었다. 언덕이 나타나서 어머니를 부축해드렸다. 그러다 부축하는 게 중심이 기울어져 더 불편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어머니에게 바짝 붙어서 손을 잡았다. 그런데 어머니가 내 손을 꽉~~ 잡으신다. 어머니가 내 손을 왜 꽉 잡으셨는지는 모른다. 물어보지 않았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마음이 뭉클했다. 어머님이 나를 예뻐하신다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걸으며 쉬며 2시간여의 산책을 즐기고 집으로 돌아왔다. 갑작스레 이루어진 어머니와의 동네 한바퀴, 너무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오랫동안 어머니와 나의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 돌아올 때도 새벽에 출발하였다. 정말 조심스럽고 조마조마한 여행이었지만 그래도 참 잘 다녀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어머님은 나의 롤모델이다. 나도 나중에 시어머니가 되면 우리 어머니 같은 시어머니가 될 것이다. 어머니에게 배운 대로 나도 내 며느리의 단점보다는 장점을 보고 ‘잘한다 잘한다’ 하며 예뻐해 줄 것이다. 호호 거기에다 플레이스타터인 놀이 할머니라면…….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물론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적당한 거리 유지는 것은 필수이다.
일상속 행복찾기
어여쁜 모모씨
-플스5기 김숙영-
여름이 시작될 무렵 오후 7시 나는 한 아이를 입양하기 위해 퇴근하는 딸을 마중 나갔다. 십 여분쯤 걸었을까 저만치서 아이를 안고 행복한 표정으로 걸어오는 딸의 모습이 보였다. 예쁜 핀을 꽂고 커다랗고 또랑또랑한 눈망울을 가진 그녀를 본 순간 나는 한순간에 반해 버렸고, 낯선 사람과 만난 그녀가 놀랄까 봐 흘낏 한 번 쳐다보는 것으로 만족할 만큼 특별한 대접을 받으며 그녀는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애완용 강아지에 대한 유행이 거세게 불어도 끄덕 않고, 개는 당연히 마당에서 키우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둘째가 저녁 식사자리에서 조심스럽게 강아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사님네 지인이 기르던 애완견이 새끼를 낳았는데 현관문을 열어둔 사이 어미가 나가 버렸다는 것이다. 강아지 세 마리중에 두 마리는 입양되었고, 나머지 한 마리를 입양할 사람을 찾는데 우리가 꼭 키웠으면 좋겠다고 했다. 듣고 보니 사정은 딱했지만 확고하게 안 된다고 선언하고, 일 때문에 까마득히 잊고 지냈다.
며칠 후 딸로부터 전화가 왔다. 부모님의 성격을 알기에 기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접었는데, 데려가기로 한 선배 언니의 어머님께서 지병으로 입원을 하게 되었단다.
의 간절한 마음에 감동을 받아 허락을 했다. 사실 나도 어릴 적 강아지를 사달라고 허구한 날 노래를 불러 어머니께서 강아지를 사주셨다.
윤기 나는 까만털을 가진 진돗개였는데, 쫑긋한 귀가 매력적인 아이라 이름을 쫑이라고 지어주고 날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들로 운동장으로 뛰어다니며 함께 놀았다. 쫑은 어찌나 영리한지 온 동네 지킴이로 톡톡히 한 몫을 하면서 어른들과 아이들에게 사랑을 듬뿍 받았다. 당시에는 학교에서 쥐를 잡아 오라고 할 만큼 쥐 소탕작전을 위해 정기적으로 온 동네에 쥐약을 놓는 날이 있었고, 다음날이면 짖궂은 아이들의 손에는 어김없이 쥐가 몇 마리씩 들려 있었다.
그것도 누가 많이 잡았나 의기 양양하게 자랑까지 하면서 말이다.
우리집은 방 한칸은 세를 놓고 살았는데 셋방 새댁이 다음날이면 수거해야 하는 쥐약을 깜박하고 수거하지 않아, 쫑은 언제 그걸 먹었는지 쏜살같이 마루 밑으로 들어가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며 한참을 울부짖다가 무지개 다리를 건넜다.
찰나에 일어난 일이고 마루 밑에 있는 아이를 어떻게든 밖으로 유인해 살려 보려고 아버지께서는 온갖 애를 다 쓰셨으지만, 이미 덩치가 커질대로 크고, 워낙 거세게 반항을 하는지라 손도 못 써보고 순식간에 보낼 수밖에 없었다.
가족들은 슬픔을 억누르고 침통한 마음으로 서로 눈치만 보는데, 나는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태어 나서 이렇게 슬픈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 같았던 이별의 아픔을 그 후로도 몇 번이나 더 겪고 나서 아버지께서는 다시는 개는 키우지 않겠다고 선언하셨다.
가슴 아픈 유년의 추억을 뒤로 한 채 어른이 되면서 나의 마음도 메말라 갔던 것 같다.
애완견을 봐도 그저 심드렁하고, ‘개엄마’ 라고 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콧방귀를 뀔 정도로 관심이 없었다. 어여쁜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동글동글 작고 귀여운 얼굴에 포도알처럼 크고 동그란 눈, 갈색 머리에 멋내기 염색을 한 것처럼 턱과 다리와 배만 하얀 그녀의 모습이 볼수록 예뻐 보이기 시작했다.
태어난 지 겨우 한 달 밖에 안되어 1kg도 채 안된 아이가 엄마품을 떠난 것이 안쓰러워 딸이 모든 뒷바라지를 다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내가 직접 돌보기로 했다.
잠잘때도 옆에 두고 지켜보고, 목욕을 시킨 후에는 감기에 걸릴까 봐 30분이 넘게 드라이기로 털을 말려주고, 두 시간이 넘는 이발도 집에서 시키면서 정성으로 키웠더니 그녀는 나를 너무나 좋아한다.
온종일 엄마가 집에 있는 날이면 주방으로, 방으로, 졸졸 따라다니고, 걸레질이라도 할라치면 걸레를 물고 놀아 달라고 장난을 치기도 한다.
베란다에서 꽃을 손질하고 있는 날은 창틀에 턱을 괴고 엎드려 바라보고, 외출하려고 화장을 하고 나서면 먼발치서 애잔하게 쳐다보다 “모모야 가자” 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쪼르르 미끄럼을 타듯이 순식간에 달려와 내 품에 안긴다.
스토커처럼 따라다녀서 가끔은 매정하게 밀쳐내기도 하는데, 다시 다가와서 살며시 자고있는 것을 보면 가여운 마음이 들어 엉덩이를 두어번 토닥여 줄 수밖에 없다, 몸이 아파 누워있으면 옆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퇴근해서 돌아오면 꼬리가 떨어져나갈 정도로 환영을 한다. 엄마가 돌아올 때까지 현관문을 바라보며 꼼짝도 하지 않아 측은하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아내가 들어오는것 보다 그녀가 기다림에서 해방되는것을 더 기뻐하는 남편은 내가 그녀를 안아주고 있는 모습을 더 좋아할 만큼 어여쁜 모모씨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다.
어느해 여름 잘 자라던 아이의 건강에 이상이 왔다. 물을 벌컥벌컥 마시던 평상시와 달리 물은 전혀 입에 대지도 않고, 시름시름 늘어져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찾아온 이상 증세에 이러다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지? 덜컥 겁이 났다.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병원으로 데려갔는데 자궁축농증으로 응급수술을 해야 한단다. 혈액검사를 해보고 이상 없으면 바로 수술을 하자고 했다. 노령견이라 걱정은 되는데 검사결과만 좋으면, 수술하고 괜찮을거라고 했다. 수술까지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는데 표현도 못하고 얼마나 아팠을까 마음이 먹먹하고 미안해서 눈물이 났다.
다행히 검사결과가 좋아 무사히 수술을 마치고, 입원을 하고, 하루 이틀 경과를 지켜봐야 한다고 해서 입원시키고 나오는데, 쫑과의 이별이 슬퍼서 엉엉 울었던 것처럼,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답답한 건 못 견디는 아이인데 좁은 케이지 안에서 얼마나 답답할까. 잠은 잘 자는지 먹을 것은 먹었는지...
밤새 잠을 설치고 아침이 되어 병원으로 달려갔다. 우리 목소리가 들리는지 금새 알아차리고 나 여기 있다고 낑낑거리며 짓는다. 휴 ~ 상태가 괜찮은가 보다 싶어 안심도 되고 짓는 소리까지도 반가웠다, 간호사가 밤새 잠 못 자고 낑낑거렸다고 전해 주며 “모모야 엄마 오셨다” 라고 하자 마취가 덜 깬 비틀거리는 다리로 꼬리를 흔들며 데려가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그랬을까 마음이 아팠다. 바로 데려올 수 있을거라 기대하고 갔는데, 아직 경과도 지켜봐야 하고 링거 맞는데 항생제와 치료제가 들어 있어서 다 맞고 나서 한 번 더 맞은 다음에 저녁때나 되어야 데려갈 수 있다고 했다. 아프고 나서 더 귀함을 알게 되었고 무사히 건강을 회복하여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평화로운 일상이 찾아왔다.
그렇게 잔인한 여름을 보내고 보석 같은 눈에 이상이 생긴 건 그로부터 10년 후 녹내장이 찾아왔다. 수없이 병원을 들락거리며 치료를 받았지만, 안압이 심해지면 안구 적출까지 해야 한다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통보를 받고 아이의 예쁜 눈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토록 좋아하던 산책도 주위의 아름다운 풍경도,..
가장 슬픈 건 더 이상 우리와 눈맞춤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딸의 간절한 마음에 동화되어 입양했던 강아지였는데 이제는 두 딸들이 떠나버린 조용한 집안에서 내게 기대어 자고 있는 그녀는 아름다운 눈망울과 기막힌 순정을 가진 우리집의 보물이다,
화장실을 찾아가다 앞이 안보여 가끔씩 실수를 해서 한마디 하려고 하면 “엄마 모모는 엄마 딸이 잖아요.!” 라고 서둘러 방호벽을 쳐주는 딸의 옹호를 받으며, 그녀는 오늘도 호랑이가 먹이감을 향해 다가가듯 한 발짝씩 조심스레 집안을 오고 간다.
벌써 새벽이다. 그녀는 내가 앉아 있는 거실에서 꿈을 꾸는지 잠꼬대를 하고, 코까지 골면서 쌔근쌔근 잠을 자고 있다. 내가 일어서면 그녀는 벌떡 일어나 주위을 살필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나는 따스하게 안아주고 공감하는 것 보다는 본인 일이니 스스로 알아서 하겠지라는 다소 방관자적인 매정함을 가지고 있었다. 어려움을 함께 해결하고자 하는 마음이 한참이나 부족했는데, 지금은 그런 마음을 다독여 줄수 있는 아량을 갖게 되었다.
한결같은 순정으로 언제나 나를 그윽하게 지켜보고 있는 ‘어여쁜 모모씨’ 덕분이다.
@아이비 아... 딸 아이가 늘 개나 고양이를 키우자고 조르고 졸랐는데... 저는 철저하게 무시하고 살았었어요. 자신이 없었거든요. 그러다 구름이를 입양했었는데 함께 사시는 아버님께서 암 투병을 하시게 되어 친정에 보내게 되었어요. 친밀함을 쌓기도 전에...
집에 온 어여쁜 모모씨와 함께 삶을 살아가시는 아이비님의 글을 보며 왜 이렇게 눈물이 흐르는지... 함께 사는 가족은 이런 존재구나... 깨닫게 됩니다.
친정에 가 있는 구름이를 다시 떠 올립니다. 친정에 가면 구름이와 멀리 멀리 함께 산책을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글 감사합니다^^
라이언... 김민정 선생님...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돌아가신 시어머님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ㅠㅠ
평화로운 관계는 어떤 것인지 크게 배우게 됩니다.
시어머님의 성품을 닮은 놀이하는 플레이스타터 할머니... 저도 같은 꿈을 꾸고 싶습니다.
보라가지 최명신의 글쓰기입니다
<코로나19가 나에게 준 선물>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명절이면 마음이 무겁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두 분이 함께 계셔서 그나마 마음이 덜 무거웠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명절이면 늘 혼자 보내신다. 그런데 코로나19란 바이러스 때문에 공식적으로 시댁에 가지 않아도 되는 일이 생기게 되어 나는 딸과 함께 엄마와 추억 만들기를 하러 나의 어린 시절을 보낸 친정집으로 갔다. 딸과 함께 엄마 집에 가서 명절 음식인 부침개, 갈비, 나물 등 여러 가지 음식을 하였다. 매번 명절이면 엄마가 명절동안 드실 음식을 해다 드리고 바로 시댁으로 가는데 가지 않고 집에 있으니, ‘엄마가 살다보니 이런 날도 있네’ 하고 말씀하시며 좋아했다. 나는 딸과 함께 이번 명절에 엄마와 하고 싶을 것을 생각하고 갔다. 첫날은 그냥 저와 딸이 있는 것이 좋았는데, 가족들이 보고 싶은지 힘들다고 하며 자꾸 방에 들어가 누우신다. 밖에 나사서 바람 쐬고 오자고 해도 힘들다며 싫다고 한다. 그러다 동생과 전화 통화를 하는데 요양원에 계시는 외삼촌에게 면회간다고 하였다, 그나마 외삼촌이 계시는 요양원은 한가족당 10분씩 창문을 사이에 두고 면회를 해주는데 면회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아 바로 요양원으로 출발해야 만날 수 있었다. 엄마에게 외삼촌 면회를 하는데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으니 가고 싶으면 빨리 준비하라고 말씀드렸더니 그렇게 움직이지 않으려고 하신 분이 5분 만에 챙기고 나오시며 빨리 가자고 하였다. 엄마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가족과 만나는 것이 저렇게 좋을까? 좀 늦어 겨우 창문 너머로 잠깐 볼 수 있었지만 그것이 계기가 되어 엄마랑 저수지로 바람 쐬러 가게 되었고, 찻집에 가서 차도 마시고 젊은 애들이 많이 가는 퓨전 음식점에 가서 음식도 먹고 코스모스 꽃밭에 가서 사진도 찍도, 엄마 집 청소도 허였다. 또, 외국에 있는 손주에게 영상 편지도 만들어 보냈다, 엄마는‘영상편지를 만든 사람은 우리 마을에 엄마 혼자밖에 없을 거야’ 하고 말하며 자랑하고 싶으신지, 본인에 핸드폰에 저장해달라고 하고 어떻게 핸드폰에서 켜는지 손녀에게 열심히 배우고 계신다. 코로나 때문에 무려 추석 연후 4일간과 엄마와 함께한 시간이 나에게 너무 좋은 시간이었다. 엄마 사랑해요~
아름 김미희의 글쓰기입니다.
* 어르신들과의 만남*
쌀쌀한 날씨, 정왕동에서 볼 일을 보고 버스를 타니 버스 안에 어르신들이 많았다.
옆자리에 앉아 계신 분과 우연히 이야기를 나누며 들어보니 시니어 선생님으로 활동하시는 어르신들 이었다.
옆자리 계신 어르신께서 하시는 말씀이다. 나이들면 아이같이 되고, 누구와 얘기하면 기분이 좋다고 하시면서 자녀들이 걱정 할까봐 아파도 참는다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앞으로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가게 될 길을 볼 수 있었다. 난 어르신께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건강하시니까 이렇게 다니시는 거아니냐고 아프시지 말고 건강하세요!" 인사로 헤어졌다.
오늘은 어르신들과 놀이 활동하는 날이다.
경로당에서 어르신들과 놀이를하던 중 멋진 글이 눈에 들어온다.
*건강하고 젊어지는 경로당*
아~~~~ 역시, 그래서 열정적으로 열심히 하시는구나
작고 아담한 곳이지만 정이 넘치는 곳 건강하고 젊어지는 겸로당 이구나
즐겁게 웃음 꽃을 피우시면서 함께 하시는 그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그 곳에 계신 어르신, 또 다른 곳에 계신 많은 어르신들의 삶의 한부분을 행복과 즐거움을 채워 가시도록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 우리 플레이스타트들이 해야할 숙제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지내실수 있게 도움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미희님 오늘 느낌 그대로 멋진 시니어플레이스타터가 탄생하시길 응원할게요.
글쓰기도 이렇게 쭉 ~~ 다음글도 기대합니다 . ^^